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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ana Nov 18. 2015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너무 늦은 방황

화해와 용서에 관해서라면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섣부른 화해와 용서는 분노나 증오보다 더 나쁘다. 화해와 용서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한 평화주의자는 동서화합을 빌미로 학살자와 화해했고 가난한 민중은 경제성장을 이유로 독재자를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용서했다. 나는 옹졸하고 강퍅한 성정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너그러웠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정당성을 부여받았으며 그리하여 나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쏟았다는 데 있다. 분명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그 잘못을, 잘못된 지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한동안 의심 없이 달려온 이 길이 잘못 들어선 길임을 알았을 때, 최선의 선택은 새 길을 찾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 길을 잃었는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애초 가려던 그곳은 어디인지, 지금 다시  찾아봐야 겠다. 다만 너무 늦지는 않기를. 


희망과 긍정에 관해서라면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타인의 불행 위에 싹트는 희망들을 무수히 목격했다. 남이 가진 약점이 내가 가진 그것보다 더 크고 중할 때, 내 약점이 그것보다 작고 가벼운 것에서 느끼는 안도와 위로. 사람들은 거기서 아주 쉽게 희망을 얘기했다. 더 불행한 사람에 비해 조금 덜 불행한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로 대치되는 희망은 그래서 착취적이다. 특히 타인의 신체적 약점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경우가 그렇다. 신체적 장애를 불행과 동일시하고 동시에 그런 사람을 불행한 사람으로 단정 짓는 것, 그러므로 사지가 멀쩡한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로 위안 삼는 희망은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 닉 부이치치가 연단에 올라 희망을 부르짖을 때, 그 자신이 긍정의 상징으로 동일시될 때, 그를 바라보며 눈물짓는 군중을 볼 때, 나는 함부로 희망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오늘을 살기로 다짐했다. 여기에는 희망찬 미래는 없고 엄혹한 현실만 있다. 다만 너무 험난하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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