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적인 존재,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은밀한 심리 조종을 일삼는 인간들은 숨겨진 암세포처럼 주변 곳곳에 퍼져있다. 그들은 우리 집 내부에 있을 수도, 일상을 스치는 인연이거나 매일 같은 사무실에 앉아있는 인간 중 한명일 수 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인간들 중 한 명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라고 단언한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 내현적 나르시시즘 적인 인간을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하다.
이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친절‘을 가장 잘 이용한다. 너무나 친절해서 조용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친절한 이미지는 그저 수단이다. 생존의 수단. 친절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를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고 정서적으로 조종하며 삶 전체를 통제한다. 이유는 무능한 자신을 누군가의 존재 이유로 격상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은연중에 감지하고 있으나 에고는 이러한 무능함을 억압하고 신성하고 대단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격상시킨 그들의 존재는 완벽하고 유능하며 타인에게 배려받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거대한 에고가 되어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나는 친절하기 때문에 이들은 나에게 친절해야 할 것이며,
내가 헌신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 또한 나에게 헌신해야 할 것이며,
그만큼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내 말을 거역해선 안될 것이다.
이 문장을 표면적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추고 싶은 욕망에 가깝다. 그들은 저런 욕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온다. 그래서 감춰놓은 욕망을 수동적으로 타인을 정서적으로 조종해 채워둔다. 만약 채워지지 않으면 본심이 겉으로 새어 나온다. 본심을 들키면 이들 주변의 인간관계 양상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자기 옆에 사람이 없어진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가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기만에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 피해자 코스프레로 주변 사람을 더 옥죄어 옆에 묶어놓는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식의 동정을 사는 작전을 친다.(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생긴다. 보통 이들이 환멸을 느끼고 정신과를 간다.)
이들의 은밀한 심리 조종은 외현적 나르시시스트와는 양상이 틀리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는 표면적으로 휘두를 수 있을만한 도구나 권력, 재물로써 타인을 휘두르지만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모호한 안개, 흙탕물 같은 더러운 에너지 형태로 타인을 휘두른다. 그래서 당한 피해자는 ‘여기가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라며 안개 자욱한 곳에서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다.
이들에게 속는 이유는 완벽한 이미지이다. (이들을 처음 봤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완벽해 ‘보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 화목하고 완전한 가정
- 희생적이고 숭고한 어머니와 아버지
- 나에게 착하고 헌신적인 연애 파트너
- 공감능력 좋고 친절한 직장 동료 및 친구
- 나에게 한없이 친절한 타인
- 빈틈이 없는 완벽하고 친절하지만 지성적인 느낌의 대상자(인성, 지식, 매력, 재산)
이런 가면을 쓴 인간들은 자신의 구린 속내와 자신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행동(예를 들면, 못생김, 비만, 가난, 능력 없음, 천박함, 추함, 낮은 인품, 정신병, 알코올 중독, 불행한 가정, 무시받는 직업, 불행, 치정, 교양 없음, 불안정한 행동, 욕설 등)을 절대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폄하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겉은 친절하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서열을 나누고 있다. 이미 표면적으로 선을 그은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 얻을 것이 없고, 통제가 가능하며, 함부로 해도 될 대상이라고 이미 내면에서 기준을 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습게 여기는 대상이 어느 날 큰 업적을 달성하거나 성취하는 모습을 드러내면 당황해하며 오히려 성취를 축소시킨다. 성취를 인정해 주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독려하기보단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다하니까~, 그런 걸 어떻게 해?, 재능이 있으니까 저런 걸 하지 난 못해.‘ 라며 열등감을 드러내거나 얼른 대화를 다른 주제로 바꿔버린다. 열등감이 커서 타인의 조그마한 성취에도 자신의 질투심이 드러나는 걸 억압할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른 주제를 바꿔버려야 한다.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자(못생김, 비만, 가난, 능력 없음, 천박함, 추함, 낮은 인품, 정신병, 알코올 중독, 불행한 가정, 무시받는 직업, 불행, 치정, 교양 없음, 불안정한 행동, 욕설 등)를 수동적으로 험담하거나 혹은 티 내진 않지만 속으론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비난하고 싶은 상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어린 시절에 그런 혐오대상자들과 밀접한 친분(가족, 배우자)이 있었거나, 혹은 자신이 과거에 그런 이미지여서 미움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마주하는 게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겉으로는 완벽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단단히 구축했지만 혐오대상자들을 대면하면 외면해 왔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다시 인식시켜 주는 거울이니 불편한 것이다.
이런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긴 어디? 나는 누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들의 대화를 분석해 보고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통적으로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들의 대화 패턴, 특징이 있다.
이들의 대화 특징
첫째, 문장의 마무리가 희미하다. 결론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때 타인에게 비판이나 지적을 들을까 봐 애매하게 대답한다.
- 자신의 속내가 드러날까 봐(타인을 무시하는 내면과 친절한 외면이 충돌) 반대의 의견도 수긍한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답한다.
- 대화를 할 때, 자신이 성실하며 열심히 사는 것 등 긍정적인 면을 자주 언급하거나 어필을 한다.
- 즉, 자랑이 심하다. 그러나 자랑은 가까운 지인의 입을 빌려한다. 그래서 자랑을 듣고 있으면, 칭찬을 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피곤하다.
- 삶에 대한 진정성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 없다. 그래서 대화가 깊이 있지 않고, 표면적인 대화만 가능하다.
- 옳고 그름을 표현해야 할 때도 중립적인 표현과는 비슷하지만 까보면 중립보단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중립으로 일관한다.
- 이들의 대화 목적은 타인의 평가, 인정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자랑, 좋은 것만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나 진실이 까발려질 것 같은 대상과는 서서히 대화를 줄인다.
둘째, 요구를 이야기할 때 타인의 요구에 응하는 듯 하지만, 결론은 자신이 요구를 우회해서 드러낸다.
- 타인이 어떤 요구 사항을 늘어놓을 때, 순응하는 척 하지만 내면에는 오로지 자신의 권리와 이득을 챙길 생각 밖에 없다.
- 그래서 적극적으로 들어주는 착한 사람 이미지를 드러내지만 이 이미지를 통해 통제할 명분을 만든다.
- 대화의 결론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입맛대로 조종한다.
- 착한 이미지, 사회 예의범절이나 도덕적 규범 잣대를 은밀하게 들이대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하면 좋잖아?, 이 정도는 해야지?, 이건 해야 하는 거야~’
- 이런 인간과 대화하고 나면 남는 게 없고 이상하게 에너지만 뺏겼다는 느낌만 든다.
- 원인은 이 인간의 착한 이미지에 완전히 속아버려 대화한 타인이 ‘내가 문제가 있나?’ 싶어 자책한다.
셋째, 자신이 마치 어쩔 수 없이 져준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늘 옆에 누군가가 대신 싸우게끔 분위기를 풍긴다.
- 자신이 희생적이고 불쌍하다는 분위기를 풍겨서 타인의 주장을 마치 이기적이고 배려 없는 인물로 분위기를 형성 후 타인을 통해 조종한다.
- 이 인간과 대화를 하고 대들거나 반대의견을 내면 이상하게 드세거나, 고집이 센 사람이 되어있다.
- 또는 마치 쳐준다는 분위기 형성 때문에 내가 마치 문제 있는 사람이 된 듯하다.
- 져준다는 분위기는 자신의 내적 권위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행동이다.
- 무의식적으로는 열등감에 휩싸여 ‘감히 내 말을 무시해?’ 같은 욕구가 치솟지만 자비로운 이미지를 유지를 위해 욕구를 거두는 것처럼 보인다.
- 욕구를 거두면서 뒤에서 이간질 및 수동적 험담을 한다. ‘요즘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내가 이해해야지..’와 같이 이해심이 많기에 피해 입은 것처럼 행동한다.
- 이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를 견고하게 다져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스라이팅의 조종자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변하지 않으면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전형적인 에너지 뱀파이어다. 이들과 엮인 이후에 죄책감, 피로감, 기 빨림, 나에 대한 의심(‘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얼른 저 인간들과 벗어나야 한다. 만약 벗어나지 못한다면 명상하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책을 읽거나, 일기를 통해 저들과 있었던 일들에 대해 기록하고 분석한 다음 들끓은 감정들을 라벨링 하며 끊임없이 파악해야 한다.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좋지만 이들과의 의심은 나를 잃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이들을 분석하는 것은 희미한 안갯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어느 날, 완벽하게 해부하게 된다면 당신은 일반적인 눈이 아닌, 마치 투시경을 얻은 것 같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의 행동과, 말, 표정, 얼굴의 미세한 긴장, 이 모든 것이 파악되면서 저 알량하고 비겁한 행동을 바로 판단 내리며, 결국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와 엮인다면 결국 본인도 내현적 나르시시즘의 성향을 한번 재고해봐야 한다. 이유는 내면의 수동적이고 기만적인 자아가 결국 외부에서 투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착화되는 정신병이다. 이들은 자신을 가엽지만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인간으로 이상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자식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무시하며 더욱 자신을 이상화한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며 자애로운 존재라고 착각한다. 필자 또한 나 자신이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한 적 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질투하고 미워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졌었고, ‘착하니까 참자’라는 기만적인 태도 또한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시기를 거치면서 내면에 묻혀있던 악한 본성을 발견하면서 몸부림치던 욕망 그 자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욕망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했고, 순수했던 욕망의 억압이 괴물을 만든 것이었다.
내현적 나르시시트와 나라는 인간이 탄생한 배경에 대해 생각을 했다. 이는 어떤 특정 종교나 어떤 나라에서 만들어낸 집착적인 도덕적 규범과 통합되지 못한 집단적 의식이 개개인에게 비합리적인 관념을 주입했다. 그러한 배경이 이러한 암적인 존재들을 대거 양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호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했던 시기가 지나고, 투명한 본질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AI시대는 그들의 나르시시즘을 더 강화하거나 또는 밑바닥으로 치닿게 만드는 방식으로 괴롭힐 것이다. 이 시기는 가짜 인간들을 도려내고 진짜 인간을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면서도 투명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가지치기가 시작될 텐데 얼른 내면의 추악함을 인정하고 거짓된 삶보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도록 방향을 바꾸는 것이 좋다.
모든 인간 중에 완벽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그걸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구현해 내려 완벽하게 위장할 것이다.
외적 허상을 쫓는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
Photo de Tarik Haiga sur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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