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세대의 엘레지
오랜만에 소설을 한 권 읽었다.
그런데 그 여운이 만만치 않다. 그동안 세월의 무게에 눌려 구석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던 먼지들이 바람에 다시 불어날리는 듯, 머리가 혼란스럽고 어제 밤에는 새벽에 잠도 잘 못잤다. 성석제는 60년생이다. 이 사람 책은 처음 읽었는데 윤흥길, 박범신,조세희 등 70~80년대 작가들과 최근의 김영하 등의 작가를 잇는 베이비붐 세대의 작가다. 이 시기의 삶을 살았던 나에게는 리얼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스토리는 일제시대의 할아버지부터 21세기 들어선 4대손 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와 어우러진 가족사이자 산업화 민주화에 얽힌 이야기이다.
무대 위의 수많은 스팟라이트가 배우를 조명하듯이 주인공인 만수를 중심으로 30여 명이 넘는 화자가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좀 산만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만큼 전개에 집중해야되고 각자 다른 입장에서의 상황에 대한 서술이고 판단이기때문에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일제시대 대학을 다녔으나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집안을 망친 할아버지를 따라 개운리_지금 경북 상주시쪽 인거 같다_로 들어와 보낸 유소년시절의 이야기가 전반부이다. 시대와 배경, 인물을 구분해 보면,
- 아들 충현은 6남매를 낳아 길렀는데 백수, 금희, 명희,만수_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옥희, 석수를 중심으로 3세대의 삶이 그려진다.(60~70년)
- 백수가 대학이 되어 서울로 떠나고 금희가 공단으로 가출하고 만수가 중학을 서울로 옮기면서 무대는 가리봉 지역으로 바뀐다.(70~80년)
- 만수가 공전을 마치고 전경복무를 거쳐 구로공단내 성일산업에 근무하다가 넘어가는 화사를 구해보고자 구사대운동에 휩쓸려 빚더미에 올라앉고 고전하다 생을 마감하는 구로동시기가 세번째 무대다.(80~2000년?)
1.백수_큰 아들로 총명해서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서울대에 진학해 힘든 고학과 연애에 실패하고 월남전으로 파병지원했다 병사한다._1st 투명인간
2.금희_옛날에 다 그랫듯이 첫째가 잘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다 맏이의 뒷바라지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당시 한창 일던 수출공단으로 올라와 힘든 미싱일을 하다가 일찍 결혼으로 고된 가족부양으로 부터 떨어져 나간다.
3.명희_공무원을 꿈꾸던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였는데 개운리에서 구로동쪽으로 이사와 살게 된 두칸짜리 전세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에 산소호흡기를 언니에 양보하느라 바보가 되어 평생을 가족에 짐으로 얹혀 지낸다._2nd 투명인간
4.만수_어렬서부터 큰 머리통, 가는 팔다리에 다른 남매에 비해 어리숙하고 느려 지천꾸러기로 집의 힘든일은 도맡아 하다가 중학부터 서울로 전학해 어렵게 공전과정까지 마치고 전경에 지원복무한다. 총상으로 제대후 성일산업에 입사해 특유의 끈기와 부지런함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 등으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덕에 어느정도 관리직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자본과 시장논리에 밀려 넘어가는 회사를 구한다고 구사대로 활동하다 법적소송에서 패소해 엄청난 부채를 갚아가며 고전하다 마포대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_3rd 투명인간
5.석수_책에는 IQ 160으로 나온다. 형 못지않는 수재로 서울대에 입학하나 민주화운동과 잘못 연결되어 대공보안사로 넘겨져 혹된 고문에 여생을 리셋하여 투명인간으로 살겠다는 각서를 쓰고 세상에서 잠수한 인물로 만수를 상당히 괴롭힌 동생이다. 운동권 여학생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태석을 형 만수에게 맡겨 키우는데_85년생 정도?) 이 아이가 또 한 몫한다._4th투명인간
6.옥희_막내이자 영리해서 서울명문사립대를 다니다 노동운동하는 남편을 만나 꿈을 접고 만석오빠의 도움으로 식당으로 성공해 빌딩을 사고 지역유지로 떠오른다. 등장인물중 유일하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성공한 인물로 자녀교육, 주변에의 영향력 등을 행사하며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가난에서 탈출한다. 그런데 옥희의 성공이 그리 축복되지 못한게 나머지 5남매의 불운과 고생이 한쪽으로 방향을 틀어 잭팟을 떠뜨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옥희의 남편 강철원은 제 복을 주체못해 강원랜드의 도박노숙자 행불자로 전락한다.
이 책이 읽은후 오래동안 머리를 아프게 하는것이 정말 리얼하게 당시의 상황을 잘 그려냇다는 것이다. 왜 뭔가 숨기고 싶은 것을 낱낱이 환하게 불까지 비취가며 드러낼 때 느끼는 당혹감이나 막막함 같읕 것일게다. 월남파병에 관한 건은 나도 우리 형이 관련되어 맘에 걸린다. 만수가 동기간에 당한 수모와 상처는 이웃한 친구형이 그 아버지에 맞고 쫒겨나 토굴에서 잠자고 생활하던 슬픈추억이 생각난다. 가족이 가리봉 쪽방촌에서 연탄가스를 마셔 명희가 바보가 될때 나는 노량진 판자촌에서 아버지를 연탄가스로 보냈다.석수가 대공분실에서 고문에 고통을 받을때 이웃집 친구 동생은 학생운동을 담당한 형사들이 집을 연신 드나들어 공포분위기를 느끼곤했다. 학교졸업후 근무하던 지역의 뚝방촌은 벌집구조의 판자촌으로 난민수용소같았다. 안양천에 비가 와서 물이둑을 넘으면 인근의 공동화장실 오물이 넘쳐 흘러 가관이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그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소설은 우리의 눈부신 경제성장, 수출 10위, 민주정부 달성 등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이면에 감춰진 우리세대_주로 베이비붐 세대의 고생과 가족을 위한 헌신, 뭔가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좀 더 낳아지지 않겠나 하는 단순.소박한 바램을 담담하게 전달하고 있다. 산업화,민주화에 수반된 그늘과 더불어 존재의 개별성이나 고유성을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당당한 단독자로 바로설 기회도 없이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온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이 책은 그런점에서 한 역을 끝내고 내려가는 베이비붐 세대의 엘레지 같은 책이다.
PS; 이야기는 만수가 마포대교에서 투신하고 그 광경을 석수가 목도하고 애통해 하는 장면으로 끊나는데 후에 작가 인터뷰를 보면 뭔가 좀 서둘러 이야기를 마친거 같은 생각이 든다. 어쨋든 만수가 투신한 건지, 다리 남단에서 차에 치어 죽은 건지, 또 만수 부인 진주씨가 태석이의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살았는지 죽엇는지 알수 없다. 명희가 연기처럼 피어울라 자기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것이 죽었다는 것인지,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사망을 의미한다면 처음과 끝에 화자로 나오는 석수도 이미 고문받다 사망한 것이 아닌지 헷갈린다.
책은 2014년 발간인데 2000년 이후의 이야기가 없다. 혹자는 저자가 2014년 세월호 사건을 접하면서 더 이상 소설이 소설같지 않고 현실이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 절망한 탓으로 이야기를 끊엇다 보는 시각도 있다. 저자는 책말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현실의 쓰나미는 소설이 세상을 향해 세워둔 둑을 너무도 쉽게 넘어들어왔다. 아니 그 둑들이 원래 그렇게 낮고 허술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사실 현재의 삶이 투명인간에서 벗어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정도와 종류의 차이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