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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반종교와 무신론을 넘어서

by 박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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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비콕스의 '미래의 종교'를 찾다가 우연히 눈에 띄여 알라딘에서 구매한 책이다. 종교철학자 이태하씨가 쓴 2015년 책이다. 부제로 '반종교와 무신론을 넘어서_종교와 신앙에 대한 지성사적 성찰과 전망'으로 되어 있다.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


우리 시대 종교는 하나의 역설이다. 서양의 계몽주의가 과학과 이성의 잣대로 종교를 광기의 온상으로 지목한 이래, 지금까지 종교적 무용성과 종교의 종언에 대한 담론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비종교인은 있어도 무종교인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숙명적으로 종교적일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인류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허무감에서 비롯된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구원할 이 시대의 참된 종교가 '신 없는 종교'인지 아니면 '종교 없는 종교'인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봄으로써 종교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는 한편, 종교의 미래를 가늠해 보려는 시도로 쓴 책이다. 이를 위해 르네상스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반종교와 무신론의 다양한 논의들을 종교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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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사유방식인 로고스와 뮈토스를 통해 종교의 본질과 현대의 무신론의 문제점을 논한다. 종교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계관과 가치관을 수용하고 삶에서 이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신에 대해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의미와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이란 종교적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가슴의 동의 이며, 바로 이 동의로 인해 자신을 비우고 신비한 초월로부터 오는 부름에 응답하는 헌신인 것이다.


2장은 로고스와 뮈토스의 개념과 더불어 종교를 바라보는 또 다른 개념인 聖과 俗을 통해 종교를 분석한다. 종교를 삶의 양식인 속으로 이해할 때 종교는 성_삶의 의미와 가치의 문제_이 아닌 단순히 현세적 삶을 살아가 는데 필요한 일종의 욕구 충족의 도구로 이해되며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으로 흐르게 된다.


3장은 뮈토스의 종교라 할 수 있는 '축의 시대'의 종교가 로고스의 종교라 할 수 있는 이신론과 자연종교로 그리고 후에 시민종교로 변천해온 역사적 과정을 르네상스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추적한다. 이신론은 로고스와 뮈토스 영역의 신을 각 각 인정한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이신론은 뮈토스 영역의 신을 밀어내고 기계론적 세계관과 과학의 독선에 빠져 '과학을 위한 종교'_자연종교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뮈토스가 사라진 자연종교에는 고백적이며 실존적인 종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그리고 삶에서의 경건'이 없었다. 다시말해 자연종교는 종교가 아닌 철학이었으며 기성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무기력한 신을 내세운 위장된 무신론이었다.


4장은 신을 믿지는 않지만 종교가 개개인의 삶에 유익함을 주고 사회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순기능이 있음을 인정하는 무신론적 도구주의를 다룬다. 무신론적 도구주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인간의 인식능력을 벗어난 외재적 질문으로 이해될 때 유용성을 근거로 종교가 수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편 로티는 종교란 세상사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자아를 창조하는데 기여하는 일종의 시적 담론과 같은 것으로서 종교적 감동은 종교가 지닌 드라마틱하고 미학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라는 '낭만적 다신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도구주의는 제삼자의 신앙과 종교를 평가하는 이론일 수는 있지만 신앙을 권유하는데는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신앙은 극히 주관적인 체험과 감동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5장은 20세기 부정신학을 대표하는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견해를 토대로 하여 카푸토의 '종교없는 종교'와 바티모의 '비종교적 기독교'의 종교철학적 의미를 다룬다. 존재자가 존재를 논할 수 없다는 부정신학을 넘어 카푸토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연의 왕국_힘,능력, 질서,논리를 지향하는 세속왕국과 달리 연약함, 무능력, 혼돈, 모순을 지향하는_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느님을 기득권자들의 세계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이념적인 토대로 보지 말고 전적인 타자로 볼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인식과 논리의 차원에서가 아닌 실천과 윤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바로 신의 의미는 그 무엇이 아닌 '어떻게'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신을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정의가 강물처럼 이 땅 위에 넘쳐 흐르게 하는 것이다.


6장과 7장은 위의 위에 살펴 본 모든 종교가 참된 종교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며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을 통해 에토스의 종교를 살펴본다. 에토스의 종교란 자아를 인식의 주체가 아닌 실천과 윤리의 주체로 일깨움으로써 세계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실천을 명령하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이 신과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라면 신과 인간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윤리적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종교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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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21세기에도 힘을 잃지 않고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신앙은 신비주의적 신앙이다.'라고 말한다. 존재의 근거로서 신비적으로 경험되는 주관적인 신 체험에 근거한 신비적 신앙만이 이 세속화 된 세상에서 헌신적인 삶을 이끌어 낼 수 있고 그로 인해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답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 중심축을 이룬 '축의 시대'의 위대한 전통으로 다시 돌아 온 것이다...

PS; 무거운 주제지만 어렵지않게 종교철학이 어떤 기반위에 서있고, 인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얼마나 고민해 왓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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