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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솔 Oct 05. 2023

벤자민 버튼과 그의 아버지가 함께 마시던 칵테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술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드라마, 영화,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 칵테일이나 위스키가 등장하면 참 반갑다.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은근히 스쳐가듯이 나오는 경우는 많지만 대 놓고 설명되거나, 씬에 주요 장면을 차지하거나, 의미가 부여되는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더 반가운 것 같다. 


한국술을 다루는 바도 이젠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주력은 거의 외국술이다 보니 이것들을 접하려면 외국 매체를 통해야 할 텐데, 칵테일이 한국에서나 특별하지 그들의 삶에서는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기 때문인지 특별하고 대단하게 의미부여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5년 전쯤에 '사제락'칵테일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았던 적이 있는데, 사실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설정 자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전개도 전체적으로 루즈한 감이 있어서 임팩트 있게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서 나는 사제락 칵테일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초반에 벤자민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유년시절까지의 어린 나이와 늙은 얼굴의 비주얼이 조금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이전에 보았을 땐 잘 보이지 않았던 브래드피트의 얼굴이 익숙하게 보이다 보니 덕분에 영화에 몰입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


한국나이로 중고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시기에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술을 한잔 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벤자민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상황이고,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둘이 테이블에 앉자 웨이터가 뭘 마실건지 물어본다.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주인공은 토마스(아버지)에게 주문할 권한을 넘긴다. 이때 토마스가 주문하는 칵테일이 '사제락'이다.



주문하는 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사제락 두 잔 주게, 브랜디 말고 위스키로"

"Sazerac for both of us with whiskey not brandy"


 내가 생각하는 사제락의 이미지는 '클래식하고 무게감 있지만 세련된' 정도로 표현하고 싶다. '올드패션드'칵테일과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위스키에 약간의 당과 비터스만을 사용하고 취향에 따라 오렌지나 레몬껍질의 향을 입혀 서브된다. 


올드패션드와 사제락의 큰 차이라고 한다면 나는 '압생트' 사용 유무라고 말하고 싶다. 올드패션드에는 압생트가 사용되지 않고, 사제락에는 압생트가 소량 사용되어 특유의 독특한 향으로 전체적인 풍미를 세련되고 향긋하게 만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렇게 칵테일이 장면에 사용될 때면 동시에 주문하는 방식이 함께 연출될 때가 있다. 아마도 등장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는 토마스 버튼이 그 시대에 큰 공장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등장하는데, 돈이 많기 때문에 바에 다니면서 술을 마시는 것에 익숙할 테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익숙한 칵테일과 주문방법이 있었을 것이며,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유행했던 술인 사제락을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브랜디가 아닌 위스키를 지정하여 주문함으로써, 성공한 사람 특유의 절제되고 깐깐하고 이성적인 면모까지 덧붙여진다. 


우유부단하지 않고 칼 같고 명확한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토마스의 모습이 자신의 자식인 벤자민 버튼을 버리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냉혈안 같은 그의 모습이 한층 더 고조되어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제락의 형태가 있지만 글라스에 얼음 없이 덜 채워진 듯한 모습이 가장 대표적이다. 


나는 올드패션드와 사제락을 둘 다 좋아한다. 첫 잔으로 진피즈나 진토닉 또는 하이볼로 가볍게 목을 축인 후 두 번째 잔으로 조금 무겁게 마시고 싶을 때 둘 중 하나를 택한다. 


진중하고 무거운 기분일 때는 올드패션드를, 조금 들떠있거나 화려한 이미지를 원할 땐 사제락을 마신다. 


칵테일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에 맞춰보면 둘 다 어차피 독한 꼰대 같은 독한 술이긴 하다. 거기서 거기일 것 같은, 비슷해 보이는 뉘앙스의 술을 자기 기분에 맞추서 마시는 것도 바를 즐기는 재미 중 하나이다.


'절제된 화려함'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멋진 바에 가서 '사제락'을 주문해서 마시길 바란다. 그 바에 메뉴판에 없어도 상관없다. 바텐더에게 정중하게 사제락을 주문하면 반가워하지 않을 바텐더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신이 나서 눈이 땡그래져서 tmi를 풀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방문해서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을 때도 사제락 주문 한방이면 금세 이야기 꽃이 펴지고 화기애애 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사제락은 bar에서 매력적인 포지션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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