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소외의 기분

by 이학민

쓴 건 많은데 쓸 만한 게 없는 날엔 도마를 꺼낸다.


가르고 나눌 수 있는 전부를 그 위에 올린다. 당근, 파, 양파, 파프리카, 햄, 버섯. 뭐든지 자른다. 자를 게 없을 때까지. 세상 모든 것을 자를 듯이.


투정이 아니라 일의 일부이다. 한 게 없는 빈손에 쥐여주는 작고 하찮은 성취. 이 정도는 줘야 내일도 일할 수 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지만, 더 확실한 성취감을 주는 쪽은 칼이다.


다만 자를 수 없는 건 불안이다. 내일도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밥 먹으면서도 고민한다.


내가 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 쓰기 위해 쓰는 글도 있다. 돈을 주는 글. 글 써서 글 쓸 시간을 버는 것이다. 정작 쓰고 싶은 글은 자주 미룬다. 살만하면 써야지. 더 안정되면 써야지. 이렇다 보니, 하는 일 많고 되는 일 없는 처지로 살아간다. 나는 늘 바쁘고 가난하다.


언제고 무너질 종이집에 사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다만 종이집도 글을 써두면 책이 아니던가.


책 속에서 살기 위해 일을 찾고, 연락하고, 기다린다. 지인에게서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으면 어디든 가서 하루 일을 한다. 이 생활에 후회는 없다. 나는 조그마한 사람. 맞춤한 크기로 살아가면 된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차피 내게 쉬운 밥벌이는 없다.


뷔페에서 일할 땐 몸이 힘들었다. 편의점에서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피곤했다. 길거리에서 후원을 독려하는 일은 성격에 맞지 않았고, 벌이도 시원찮았다. 동료와의 갈등도 있었다.


온라인 기사를 쓸 때는 벌이는 괜찮았으나 내 시간이 없었다. 밖은 소란했고, 사는 게 자주 지겨웠다. 주변에서 들려온 목소리도 그랬다. 저마다 어려움이 있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지인의 말.

“자꾸 사람들이 전화를 피해요.”


옷 가게 점원의 말.

“세상엔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일복 넘치는 친구와의 대화.

“수당은 쌓이는 데 쓸 시간이 없어.”

“저런. 그렇다면 내가 써 줄게.”

“안 돼. 병원비로 써야 해.”


친구의 말처럼 일보다는 몸이 먼저다. 몸이 성해야 일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일할 몸을 유지한다. 잔병 많은 내게는 그것도 부담이긴 하다. 아플 때마다, 병원에 가거나 검사를 받을 때마다 가난의 기분을 확인한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책임지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다. 그런데도 내 일을 더 잘하고 싶다면 욕심이다. 내가 슬픔에 욕심내는 이유는 두려워서이다.


포기를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 묻는다. 다른 일을 한다면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질 수 있을까. 그렇다고 대답한다. 같지만 다른 질문. 내일은 내 일을 할 수 없다면. 이번엔 반문한다. 어떻게 죽은 채 살아가나요?


가난 없이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서 가장 먼저 줄인 것은 약속이었다. 불편하거나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했다. 작별은 만남보다 자연스러웠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가난과 그로 인한 수치를 들키면 멀어졌다. 상대를 볼 때마다 기억이 따라와서, 폐 끼치는 기분이 들어서, ‘주고받음’은 내 힘으로 띄어 쓸 수 없어서 슬며시 거리를 두었다.


전화를 피했고 모임과 여행을 앞두면 ‘당일에 아플 예정’이었다. 미안해하기도 지쳐서 많은 연을 놓고 돌아섰다. 비참할 때도 있었으나 주로 안도했다. 그립기도 하나 자유로운 것도 사실이다.


가난은 양말 같다. 눈길을 두면 보이지만, 바닥까지는 아무나 볼 수 없다. 긴 시간 갈아신지 못하면 피부에 눌어붙는다. 그런 채로도 걷는다. 들키기 싫은데, 때때로 들킨다. 좌식 식당에 갈 때. 해서 나는 신발 벗고 들어가는 식당은 가지 않는다.







밥벌이만 고단한 게 아니다. 먹는 것도 일이다. 하나의 입이라도 그렇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데, 혼자서는 식사할지, 거를지 먼저 고민한다. 다만 마감 날엔 선택지가 없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으려고 한다. 그래야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감 후엔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힘이 남은 날엔 간단한 요리를 한다. 오늘은 이른 새벽 시작한 원고가 오후 늦게 끝났다. 원고를 메일로 보내고 도마를 꺼냈다. 가르고 나눌 수 있는 전부를 그 위에… 그렇다. 마감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쓴 건 많은데 쓸 만한 게 없는 느낌.


서둘러 밥을 볶아 먹는데 창밖에서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이집 차였다.


“오늘은 ○○이가 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어요. 많이 칭찬해주세요.”


차에서 내린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을 다 먹는 것만으로도 칭찬받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밥을 비웠다. 남김없이 먹었다. 그러고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게 많은 손. 이제, 설거지할 손. 나의 손은 늘 나보다 바쁘다.



작가의 이전글글과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