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고요한 오후

여유로움

by 소소함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머금으니, 입안에 퍼지는 쌉싸름함이 오늘 같은 화창한 날과 묘하게 어울린다.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비수기 제주도의 주말 오후, 이 고요함이야말로 내가 이 섬에서 찾은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는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다. 여름철 북적이던 해변가는 이제 몇 명의 산책객만이 느긋하게 걸어갈 뿐이다. 파도는 여전히 리듬감 있게 밀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하지만, 그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물장구 소리에 묻혀있던 바다 본연의 목소리를 이제야 제대로 듣는 것 같다.


서울에서의 30년을 돌이켜보면, 이런 고요함은 사치였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살았고,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제주도로 온 지 10년, 이제는 이 느린 시간의 흐름이 내 삶의 리듬이 되었다.


멀리 보이는 오름들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그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만 년을 그 자리에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오름들을 보면, 내 작은 고민들이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게 된다.


이런 날이면 글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제주도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여유로움이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