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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가라치바 Dec 13. 2023

후지산! 그런데 이제 바이크를 타고 - 제5화

몸살과 함께하는 이즈반도와 술

Day 4


하코네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에 너무 피곤해서 잠은 잘 잤지만 이놈의 2층 침대가 썩 쾌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료칸이 아니라서 아침에 온천에 들어갈 수 없는 것도 아쉬웠다. 나는 샤워로 타협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나갈 준비를 했으나 문제가 하나 생겼다. 형이 몸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어제 찬 바람을 맞으면서 긴 일정으로 무리를 한 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몸살인가 싶었다. 일단 아침은 나 혼자 먹는 걸로 하고 체크아웃 직전까지 좀 쉬도록 얘기를 했다.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지 조금 걱정이었다.

아침 메뉴, 브런치 카페에서 나올 것 같다.

로비에는 이미 아침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서양권 사람들이었다. 사용하는 언어도 다양해서 게스트 하우스의 범세계적 인기가 신기했다. 외국인이 이용하기 편한 뭔가가 있었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구석자리에 앉으니 음식은 금방 나왔다. 메뉴는 브런치 카페 같은 곳에서 흔히 나올 것 같은 구성이었다. 샐러드, 스크램블 에그를 야채와 볶은 것, 크루아상과 번 한쌍, 버섯볶음 그리고 정체를 잘 모르겠는 수프가 전부였다. 예상대로 맛은 평범했지만 재료는 신선했다.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가서는 나도 조금 더 눈을 붙이다가 체크아웃 아슬아슬할 때가 돼서야 형을 깨웠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예정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일단 큼직한 일정은 그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몇 시간 자고 나니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은 모양이었고 어차피 다음 숙소로 가려면 지나야 하는 루트이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숙소에는 이전보다 일찍 향하고 돌아가는 길에 약을 사기로 했다.


숙소를 나와서 처음 향한 곳은 이즈 스카이라인이었다. 전날 달렸던 능선길과 비슷하게 산 중턱을 따라 달리는 코스였지만 이번에는 후지산이 더 멀리, 바다가 더 가깝게 보였다.

먼 후지산과 가까운 태평양

그리고 조금 더 고즈넉한 길이었다. 중간중간 걸어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보이고 전날에 달린 코스가 "차와 오토바이가 달리는 길"이라면 이즈 스카이라인은 "그냥 풍경이 좋은 길" 에 가까웠다. 어느 쪽이 더 좋았냐를 생각하면, 코스의 볼거리는 전날이 더 좋았지만 그냥 달리기에는 스카이라인이 더 좋았다.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스카이라인 중간에 있는 찻집에도 들를 생각이었는데, 여기는 비정기적으로 영업을 하는 터라 열려있을지 확신을 하기 어려웠다. 얼마간 코스를 달려 발견한 찻집 토게는 다행히 열려있었다. 처음에는 예약제로만 운영한다고 해서 텄구나 싶었는데 가게 안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이라면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감사히 받았다.

참으로 고즈넉하다

가게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구옥에 메뉴도 몇 없었다. 정식 아니면 팥죽인데 배를 채울 생각은 없었기에 팥죽을 두 개 주문했다. 이번에도 멍청이가 사진을 안 찍어서 음식 사진이 없지만, 큰 찹쌀떡이 들어간 단팥죽에 특이하게 찬으로 무 절임이 나왔다. 단무지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냥 짠 무였다. 지금 생각하니 단짠 조합이라고 하면 그럴싸하다. 팥죽의 맛은 진하고 좋았지만 그걸 떠나서 꽤 달았다. 한국 단팥죽 보다도 달고 끼니보다는 디저트에 가까운 느낌? 그래도 달고 따뜻한 것이 속에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찻집을 나와서 몇십 분 정도를 달리니 스카이라인은 끝이 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즈 반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처음으로 찾은 장소는 오무로 산 이라는 화산이었는데 경사가 가파르고 안쪽에 분화구가 있는 형태라고 했다. 문제는 우리가 찾은 날에 강풍이 불어서 리프트가 운행 중지 상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리프트가 아니면 올라가는 게 불가능해서 딱히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그냥 사진을 몇 장 찍고 안쪽 기념품 매장만 둘러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오무로 산은 이번 여행에서 유일한 방문 했으나 둘러보지 못한 관광지로 남았다.

오무로 산, 올라가 보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히로이라는 이름의 주류 판매점인데, 어떤 특별한 역사를 가진 관광지는 아니지만 이전화 부록에서 얘기했던 캠핑 만화에 주류점 주인이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역시 일본이라고 해야 할지, 본인은 술도 만화도 좋아하니 만족했지만 그다지 많이 찾을 장소는 아닐 것 같았다. 나는 만화에 나오는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지역 사케를 조금 샀다. 상술에 말려든 관광객 같아서 뭔가 분하지만 사실 그 말대로였다. 관광이고 기념품이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만화 캐릭터가 잔뜩 진열되어 있다. 그 만화가 지역 부흥에 꽤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다음 목적지는 베어드 양조장이라는 로컬 맥주 양조장이었지만 중간에 마트가 있어서 약을 먼저 구매하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양조장까지 가면서 달리는 이즈의 산길과 시골 들판이 참 멋있었는데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숙소에서 나온 것부터가 늦은 시간이었던 터라 멈춰서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조금 더 느긋하게 길을 달리고 싶은 마음이다.


베어드 양조장의 특이한 점은 건물 옆에 캠핑장이 있다는 점이었는데,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양조장이 있는 장소 자체가 워낙 시골이라 차가 아니면 찾아오는 게 불가능한데 운전자는 술을 마실수가 없으니 실컷 마시고 자고 가라는 깊은 뜻이었다. 이건 바이크로 여행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라 다른 사람들이 이런저런 맥주를 마시는걸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매장에서 병맥주를 팔고 있어서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맥주를 몇 개 골라 담았다. 음주운전은 인생을 망친다.

맥주 샘플러와 캠핑장
관광지에 가깝지만 실제로 맥주 생산도 한다.

우리 말고도 바이크를 타고 방문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들고 있는 봉투가 무거웠다. 바이크 여행의 가장 큰 단점인데, 아무리 맛있는 안주와 맥주가 있어도 마시지를 못한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미련을 모아 저녁에 회포를 푸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양조장을 나오니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오늘의 숙소고 일정은 그걸로 종료였다. 다른 날에 비해 일정을 끝내는 게 조금 이르긴 했지만 형의 컨디션도 있고, 다음날이면 도쿄로 돌아가는 긴 코스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양조장에서 숙소까지는 금방이었다.

자전거와 일본식 방의 조합이 오묘하다

숙소 이름은 코나 스테이, 코나는 지명이고 스테이가 왜 붙었나 싶었더니 호텔방 말고도 도미토리 룸이 있었다. 더 특이한 건 호텔 안에 자전거를 수리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는데, 복도에도 자전거 거치대가 즐비하고 심지어 객실 안에도 자전거를 따로 놓아두는 공간이 있어서 자전거에 진심이네 싶었다. 내가 갔을 때는 겨울이라 몰랐지만 여름이나 봄에는 이즈의 자전거 관광객이 많다는 모양. 뭐 그래봐야 자전거는 내 흥미가 아니고 온천이 있다는 게 더 반가웠다. 료칸은 아니니 공용 목욕탕에 가깝긴 했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일 수 있다면 뭐라도 괜찮았다.


형은 피곤했는지 체크인을 하고 약을 먹고는 바로 잠들었다. 나는 탕에서 몸을 지지고 밀린 빨래를 해치운 후 주변 식당을 좀 찾아봤다. 돈가스집이 있는 걸 보고 딱 정하긴 했는데, 형도 자고 있는 마당에 식당 메뉴판을 읽을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결국 구글에서 미리 메뉴를 찾아보고 주문할 음식 이름을 외워버렸다. 돈가스와 게살 고로케 정식 그리고 맥주를 시켰는데, 이제와서는 놀랍지도 않지만 음식사진이 없다.


돈가스는 전형적인 일본식 돈가스에 소스도 무난하고 매장은 술 취한 사람들과 TV소리로 시끄러웠지만 그게 오히려 동네 식당에 온 것 같아서 좋았다. 깔끔하고 외국인 투성이인 가게는 신주쿠만 가도 널리고 널렸다. 그런 걸 원했으면 바이크를 타고 이렇게 돌지도 않았겠지. 나는 맥주를 단숨에 마무리하고 하이볼을 한 잔 더 마신 후에야 가게를 나왔다. 숙소까지 걸어가면서 가게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외국인인걸 알았을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적어도 지역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방으로 돌아가 보니 형이 깨어있었다. 몸이 좀 어떻냐고 하니 감기기운은 거의 없어져서 배가 좀 고프다고 했다. 입맛이 돌아왔다는 건 컨디션이 돌아왔다는 증거고 역시 피로로 인한 가벼운 몸살이 맞았다. 형은 숙소로 들어오기 직전에 편의점에서 사 온 것들로 요기를 하고 나는 캔맥주를 하나 더 마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새벽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내일 예보는 맑음이라 오래 내릴 비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이크에 묻은 물기를 닦아야지. 바이크 여행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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