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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꺼 Nov 16. 2023

동남아시아의 파리

베트남 사파와 달랏, 라오스 팍세


제국주의 시기 영국과 더불어 대표적인 열강으로 꼽히던 프랑스는 아시아 지역에 교두보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러한 열망은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세 국가를 식민지로 삼는 결과로 이어진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이라고 불리는 이 식민제국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60여 년 동안 지속된다.


60년이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 것 같지만 이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생각보다 사회 전반에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이 많이 남아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유럽과 열대 지역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이색적인 건축물도 그렇고, 커피와 바게트를 즐기는 식문화도 아시아에선 인도차이나 동부 지역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던 중에 문득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프랑스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도시(혹은 여행지)가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터넷에 ‘베트남 프랑스’ 혹은 ‘라오스 프랑스’를 검색해 봤는데, 이름 있는 여행지는 모두 검색되어 경중을 따기지 어려웠다. 한국도 근대문화유산이 전국에 퍼져 있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답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 정보가 많지도 않은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파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 제국이 식민지 지배 시기에 다양한 목적을 갖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과거에 사이공이라고 불렸던 호치민이 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프랑스가 직접 지배한 지역인 코친차이나와 자치권은 남겨두는 보호령(안남, 통킹, 캄보디아, 라오스)으로 나뉜다. 아무래도 코친차이나 지역이 프랑스의 지배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호치민은 코친차이나 지역의 수도였다.


여전히 호치민에서는 식민지 시기에 건설된 건축물들이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호치민은 독립 이후에 남베트남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통일 이후에도 경제 성장을 거듭하여 베트남의 최대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호치민은 프랑스 풍의 도시라기보다는 대도시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호치민 말고도 여러 도시들을 건설했다. 영문 위키백과에서 소개된 대표 도시로는 베트남의 사파와 달랏, 그리고 라오스의 팍세가 소개되었다. 사실 인도차이나 동부는 여태까지 두 번 밖에 여행한 적이 없었는데, 운 좋게도 사파와 팍세를 모두 여행했다. 첫 여행 때는 중국 윈난성에서 국경을 넘어 사파와 하노이를 여행했고, 두 번째 여행에서는 방콕으로 들어가 동부 국경을 넘어 팍세를 중심으로 라오스 남부를 여행했다.


공교롭게도 각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를 꼽으면 사파와 팍세이다. 그전까지는 두 도시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돌이켜보니 모두 프랑스의 향이 진하게 남아있던 도시였다. 두 도시가 유독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도시가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적 매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세 도시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해 본다. 첫 번째 도시는 사파이다. 사파는 중국 윈난성과 국경이 접해있는 베트남 최북단의 도시이다. 내가 여행했을 당시에도 국경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들어갔더니 사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제국에 의해 사파가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베트남의 소수민족인 몽족이 살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 지역을 중국 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 개발시키기 시작한다. 사파는 베트남 최고봉인 판시판 산이 위치해 있을 정도로 험준한 산악지대이기도 했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이곳의 산악 기후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사파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피서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지금도 사파에 가면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베트남 사람들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한국에도 몇 년 전에 신서유기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내 기억에 사파는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도시의 규모치고는 커다란 광장이나 예배당이 있어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사파는 주변의 자연경관도 수려하여 당시 사람들이 왜 사파를 휴양도시로 삼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사파만큼이나 팍세의 역사도 흥미롭다. 프랑스가 진출했을 당시 라오스는 루앙프라방 왕조, 비엔티안 왕조, 참파삭 왕조로 분열되어 있었다. 루앙프라방 왕조는 독립적인 왕조였으나, 비엔티안과 참파삭 왕조는 태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영토 확장에 욕심을 내던 프랑스는 태국을 협박하여 라오스 지역을 할양받아 보호령으로 삼는다. 팍세는 이 중 참파삭 왕조의 수도였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팍세를 내륙 진출의 주요 거점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도시 개발을 진행한다.


현재까지도 팍세는 라오스 제2의 도시이자 남부 지역(참파삭주)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심지라고 해봐야 인구가 15만 명을 넘지 않는다. 한국에서 라오스 여행하면 북부가 대부분이고 남부로 가는 교통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팍세라는 도시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팍세에는 유난히 프랑스 여행객이 많았다. 그 흔한 한국인과 중국인 여행객도 없고, 심지어 유럽 사람들도 국적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프랑스 사람이었다.


이런 배경에선 도시의 풍경이 이색적일 수밖에 없다. 도시 한가운데는 메콩강이 흐르고, 도시 곳곳에 불교 사당이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라오스답지만, 알록달록한 콜로니얼 양식의 건물들과 서양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은 팍세를 다른 도시와 구별 짓게 만들었다. 그래서 팍세는 아직까지 내가 가본 동남아시아 도시 중에 모스트 원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도시는 달랏이다. 달랏의 역사는 사파와 비슷한 면이 많다. 원래 달랏은 베트남 남부의 고원지대로 랏족 등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전역을 탐사하던 프랑스의 화학자들에게 달랏이 발견된다. 달랏 역시 고산지대의 서늘한 기후로 인해 휴양 도시로 개발이 되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해안가의 무더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달랏에 모여들게 되며 크게 발전한다.


달랏은 사파와 함께 베트남 사람들의 대표적인 신혼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북부에는 사파, 남부에는 달랏이 있는 셈이다. 최근에 나 혼자 산다에서 베트남의 현지 여행지로 소개되기도 했다. 달랏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주로 자연경관과 함께 유럽풍 도시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인 컨셉이 사파와 매우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달랏은 아직까지 여행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파와 팍세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다면 달랏 역시 만족스럽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 (물론 기대가 크면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 아무쪼록 다음에 인도차이나 동부를 여행하게 된다면 여행 코스에는 달랏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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