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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둑괭이 May 25. 2022

④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 들

지독한 슬픔

셋째 날 上




6시 30분

어제보다 따뜻한 날씨, 아직 어둠은 짙게 깔려있고 작은 배낭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가요? 몸이 느끼는 온도는 어제보다 쌀쌀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성산일출봉 입구로 가는 버스정류소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타야 하는 버스는 201번입니다.

검색해보니 68개의 정류소, 예상 소요시간 1시간 28분입니다.

 

“성산 갑니까?”

버스에 오르며 확인 차 말했습니다.

“성산 어디 감시냐? 이 차는 오조리로... 감서..”

하늘색 셔츠에 남색 조끼를 단정하게 입은 기사님이 반가움 반 의심반 섞인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 네 괜찮아요”

응? 괜찮다니... 자리에 앉고서도 한참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내가 말한, 나만 아는 ‘성산’은 성산일출봉 입구 근처 성게 밥과 해물라면으로 유명한 '경미네 집'을 의미했고

이를 알 리 없는 기사님에게 ‘성산’은 아래로는 표선읍, 위로는 구좌읍 사이에 있는 성산읍 전체로 전달됐을 텐데... 기사님의 제주 사투리를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으나 오조리 포구 쪽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그쪽으로 가는 게 맞다는 뜻이었는데 내 입에서는 그냥 ‘괜찮다’로 나와버렸습니다.


나의 무심함 비해 기사님은 나를 성산일출봉 가는 관광객으로 짐작하였고, 이 버스가 성산일출봉 입구까지는 가지 않고 오조 포구를 지나 사거리로 간다는 이야기를 친절하게 해주었던 겁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야기를 상대방도 알 것이라고 말할 때 오해와 다툼은 만들어지는 건가 봅니다.

'기사님 죄송해요.'


나를 포함해 모두 3명의 승객을 태운 201번 버스, 함덕 오일장터 앞에서는 3~4분 정차해서 혹시 모를 손님들을 기다리기도 하고 서두르지 않고 편안하게 달립니다.

어제 친구와 트럭을 타고 지나온 길이라 눈에 익습니다. 아직 버스 창 밖은 어둡습니다. 겨우 하늘에 빛 기운이 들면서 도로가 구분되는 정도입니다. 이쯤이면 월정리 해변을 지나고 있겠구나... 말고기 김밥을 먹겠다고 식당을 찾아다녔던 해안도로도 지났겠지.  조금씩 하늘색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세화리 이정표가 보입니다. 동네 이름 참 이쁘네요.


201번 노선, 삼양동 ~ 성산일출봉 입구


가늘 세(細), 꽃 화(花)로 표기된 세화리.

‘가는 꽃’이 뭐길래 동네 이름이 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유채꽃인가? 안개꽃인가? 제주도에 있는 내가 모르는 꽃이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세화리, 좀 더 가면 종달리, 두 마을을 안고 있는 구좌읍은 뿌리작물이 잘 자라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 대부분의 밭에서 당근, 감자, 무, 콜라비, 비트 농사를 짓습니다.


검색엔진에서 세화리의 정보를 찾았습니다.


명칭 유래 : 옛 이름은 ‘가는곶’이다. 곶은 수풀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으로, 가는 곶은 가늘게 뻗은 수풀 또는 덤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가는곶 마을, 이것도 좋은데. 한자로 표기되면서 ‘가는 꽃’으로 해석되어버린 셈입니다. 이 마을도 일본의 식민지배 당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일까요? 어쨌든 세화(細花)와 관련된 꽃은 없습니다.


지금 쯤이면 오조포구 쪽으로 좌회전해야 하는데 버스가 곧장 앞으로 갑니다. 기사님이 설명한 그 갈래길인가 봅니다. 이번에 내려야 합니다.


8시 20분

때 맞춰 잘 내리긴 했지만 성산일출봉 입구까지 가려면 버스로 두 정거장 더 가야 합니다. 걷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 일출로를 지나는 길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또 그 길에는 광치기 해변도 있어 물 때가 잘 맞으면 신비로운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곧게 뻗은 일출로에서 뜻밖의 만남, 걷는 길 쪽으로 조랑말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안녕 조랭이 !"

‘착하게 생겼는데 맛은 없어 보이는구나’ (말고기 김밥이 내내 아쉬웠나 봅니다 ^^;)

좀 미안한 마음에 마구마구 쓰다듬어 줬습니다.


성산일출봉 방면 일출로 조랑말


 걷다 보면 비로소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광치기 해변으로 갈까 말까 고민됩니다. 물 때도 맞지 않고 시간도 부족합니다.

썰물 때 광치기 해변은 용암이 바닷물과 만든 너럭바위 위에 초록의 바다이끼가 덮여 신비로운 모습을 연출합니다.


광치기 해변 바다이끼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치기 해변은 지독한 슬픔을 품고 있습니다. 광치기는 ‘관치기’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먼 옛날 바다에서 갑작스러운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나는데 수심이 얕은 이곳 해변으로 남편이자 아버지의 시신이 밀려왔고 가족들이 관에 수습했다고 합니다. 삶의 터전인 바다에 대한 원망과 죽은 이에 대한 애절함이 사무친 곳입니다.


광치기 해변에는 ‘터진 목 4.3 유적지’도 있습니다. 먼 옛날도 아니고, 71년 전 일어났던 일이지요. 제주 곳곳에 있는 4.3 유적지는 대부분 양민들이 학살당한 곳입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육지에서 건너 온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광치기 해변은 성산일출봉과 떠오르는 해를 같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제주 최고의 포토존입니다. 봄이면 유채꽃밭까지 화려한 색을 더 하는 곳이지요.

더 많은 관광객이 이 곳을 찾아 멋진 사진으로 추억하길 바랍니다.

단 한 가지, 지금 서 있는 검은 모래 위에는 '제주 4.3 사건' 이후 억울하게 죽어간 제주도민들과 그 가족들의 애절한 피눈물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면 합니다.


얼마 전 ‘조국 사태’로 대한민국이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누어졌던 시기,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서북청년단’이 등장했습니다. 일부 몰지각하고 몰상식한 극소수 극우 세력이 서북청년단 완장을 차고… 뉴스로 알게 됐지만 기절할 뻔했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71년만에 다시 나타난 '서북청년단'은 도저히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바로잡지 못한 역사가 낳은 괴물입니다. 때를 놓치고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10. 경미네 집


광치기 해변을 지나 오늘의 첫 번째 식당 목적지인 ‘경미네 집(경미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식당이 자그마했습니다. 몇 걸음 앞 선 분들이 문을 열어보더니 이내 닫고 돌아섭니다. 자리가 없나 봅니다. 조금 벌어진 문틈으로 들여다보는데 테이블이 5개 정도 되어 보였고 손님들이 앉아있습니다.



일단 1번 대기자입니다.

20대 중후반 커플이 나오기가 무섭게 들어갔습니다. 밖에서 보지 못했던 테이블을 합치니 6개입니다. 안쪽으로도 확장한 듯 보이는 공간이 있는데 6개 테이블이 더 있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성게 밥(12,000원)을 주문했습니다. 해물라면(7,000원)도 인기 있는 메뉴입니다.

가게 안은 정갈합니다. 부엌도 오픈되어있고 조리도구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일하시는 분들이 참 친절합니다. 여럿이 온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다가 돌아나가는데 혼자 4인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에게 전혀 눈치 주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좀 불편한 기색을 보이니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맛있게 먹어라”며 편안하게 해 줍니다.


성게알은 해삼 내장이나 멍게만큼 짙은 향이 나지는 않습니다. 씹을 때는 고소하다가도 덤덤한 맛인데 목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은은한 바다향이 납니다.

성게알은 미역국에 들어있을 때 맛이 다르고, 각 종 물회에 들어가 있을 때 맛이 또 다릅니다. 날 것이었을 때와 익혔을 때, 따로 먹었을 때와 섞어 먹었을 때가 다릅니다. 해삼 내장이나 멍게와 달리 다른 재료와 어울릴 줄 아는 음식입니다.


경미네를 찾아온 이유는 제주에서 드물게 ‘성게 밥’을 하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채소를 넣은 ‘성게비빔밥’과는 다르게 성게 밥은 성게알과 김으로만 맛을 냅니다.


경미네 집 성게 밥


드디어 성게 밥이 등장합니다. 파송송 바지락 미역국, 배추김치도 같이 나왔습니다.

소복이 내려앉은 성게알 다칠세라 젓가락으로 결을 따라 비벼봅니다. 밥 알에 잘 코딩된 성게알은 김과 어울려 또 다른 맛을 만들어냈습니다. 아까워서 반 숟가락씩 담았는 데도 입으로 들어가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습니다.

너무 빨리 끝나버렸습니다. 아주 강력한 해물라면의 유혹을 뿌리치고 경미네를 나왔습니다.


여전히 비가 왔습니다. 가방 안에 우산이 들어 있었지만 그냥 벙거지 모자를 쓰고 바닷가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성산일출봉은 인증해야겠지요. 경미네 맞은편 골목으로 가니 바로 성산일출봉이 보입니다.


“ 여보세요. 형~ 이제 다다음 정류소가 성산일출봉 입구네요. “

“ 내려서 기다리시게, 내가 그쪽으로 찾아 갈게”

혼자 하기로 한 여행은 지금까지인가 봅니다.


어제 저녁 목포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는 안 소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월요일 가족들과 서울에 가는데 저녁시간에 볼 수 있냐는 내용이었죠. 혼자 제주에 있어서 보기 어렵다는는 이야기에 안소장은 버럭 했습니다.


“아니 회사서 잘렸소? 청승맞게 혼자 뭔 제주도여. 흐미 나한테 이야기혀서 같이 가든가 기다려보시오. 내일 일요일 아침 비행기 타고 갈 테니... “ 아직 찰진 남도 사투리가 귓 전에 아직 남아있는데 안 소장을 성산일출봉 입구 버스정류소에서 만나게 된 겁니다.

첫 마디가  “렌트를 했어야 하는데 잘못한 거 같다”며 투덜거립니다. 혼자 하는 여행 계획은 틀어지겠지만 멀리서 단박에 온 친구가 반갑습니다.


"식사하러 가세"

다음 식당은 경미네 집에서 가깝습니다. TV 프로그램에서 보고 메모해 둔 곳입니다.


   #11. 막둥이 해녀 복순이네


택시는 아침에 혼자 걸어왔던 일출로를 되돌아 나갑니다. 조랑말은 보이지 않았고 걸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지나쳤습니다.


지금 가는 곳은 '막둥이 해녀 복순이네'입니다. 어제 저녁 마지막 식당이 ‘상호네 숯불구이’였고 오늘 아침 ‘경미네 집’이였으니 3연속해서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간 식당에 가게 됩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갈 만한 식당을 찾았는데 이름이 들어간 식당이 꽤 많았습니다.


전복물회, 전복죽으로 유명한 ‘순옥이네 명가(도두1동), ‘갱이네 보말칼국수(이도2동)’는 보말칼국수와 접시 고기 맛집, ‘순희 뽀글이 정식(오라1동)’의 6천 원짜리 정식은 제주 최강 가성비를 자랑합니다. 연안부두 쪽에 있는 ‘선미 한정식 뷔페’는 8천 원으로 돔베고기와 갈치구이를 쌓아두고 먹을 수 있는 곳이라 합니다.

애월에 있는 ‘임순이네 밥집’은 몸국, 고기국수가 맛있고, 서귀포 ‘다정이네 김밥’은 서귀포시 3대 김밥 중 한 곳으로 추천받은 곳입니다. 서귀포 ‘용이 식당’은 제주 현지식 두루치기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할머니의 이름을 딴 ‘이정의 댁’은 중문의 핫한 디저트 카페입니다. 제주 3대 해장국 중에 하나인 ‘은희네’, 너무나도 유명한 ‘김만복 김밥’.

이번 여행이 40끼가 아닌 이상 모두 가보지 못하지만 가 볼만한 리스트 중에 사람 이름이 식당인 곳이 많았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아니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 현상이긴 한 걸까요?

조심스럽게... 제주도의 ‘괸당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제주 특유의 공동체 문화라고 합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괸당 문화를 이야기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내가 제주에서 얼마나 먹고, 얼마나 살았다고, 뭘 안다고…


괸당은 ‘혈족, 친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오픈사전)

척박한 섬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돈의 8촌까지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만들어 온 공동체 의식입니다.

괸당의 일이면 먼 친척, 이웃도 모두 발 벗고 나섭니다. 괸당에게는 더 좋은 가격에 물품을 공급하고 사람을 쓰는 데에도 괸당만 한 레퍼런스 체크도 없습니다. 괸당의 괸당도 챙기며 사는 곳이 제주입니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동의하기 힘든 문화입니다.


막둥이 해녀 복순이네 입구에 있는 벽화


어쩌면 경미네, 순옥이네, 임순이네, 은희네는 괸당을 부르는 이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루는 음식의 특징과 원조임을 내세우는 일반적인 식당 명보다, 식당을 운영하는 이의 이름은 훨씬 눈에 띄고 강력한 힘을 가졌을 법합니다.


막둥이 해녀 복순네는 큰 찻길가에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절로 미소 짓게 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해녀가 안고 있는 큰 물고기도 괜히 맛있어 보입니다.

복순네에서 파는 해산물은 복순 씨가 직접 물질해서 장만한 것이지요. 거의 오픈 시간(10시 30분)에 갔는 데도 손님들이 꽤 있습니다. 끝나는 시간은 오후 4시입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은 휴무입니다. 오늘이 일요일 10시 40분이라는 점에 감사합니다.


복순네에서는 해산물 물회와 성게 칼국수를 먹어야 합니다. 해산물 물회는 2인 이상 주문이 가능합니다. 혼자 왔다 하더라도 2인분을 시켜서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목포에서 온 친구 덕에 고민은 없었습니다.



복순네 해산물 물회

                                  

선한 눈을 가진 아가씨가 먹음직스러운 물회와 한라산 17년 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해녀가 만든 물회답게 전복, 참소라, 해삼, 성게알에 참미역이 맛을 내고 있습니다. 된장이 기본 간을 잡아주고 맑은 국물이 해산물들의 맛을 살려주고 있습니다. 한 입에 같이 넣어도 오른쪽에는 전복 향을 왼쪽에서는 소라 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매 번 그 맛을 느끼라고 한라산 소주를 중간중간 마십니다.


“ 물회가 좀 부실하네.” 안 소장이 갑자기 딴지를 겁니다.

“ 여긴 회가 없어, 목포에서는 말입니다. 회가 국수 면발처럼 들어있어요. 여거슨 국물도 너무 심심하고… 형님 목포로 오시오”  

이게 제주 해물 물회의 맛이라고... 입안에서 전복, 소라, 성게 맛이 팡팡 터지지 않니?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네요. 삐뚤어져 있습니다. 친구의 목포음식 부심 덕에 물회는 내가 좀 더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음식을 내주던 단아하게 생긴 아가씨가 아무래도 복순 씨의 딸로 보였습니다.


“ 저기 따님, 복순 씨 계시나요. ”

“ 네, 계셔요. 이따가 불러드릴게요.”  

성게칼국수도 시킬까 고민하고 있는 중에 복순 씨가 웃으면서 왔습니다.

“ 음식 맛은 괜찮으신가요’


벽화에 있던 해녀가 그냥 그려진 게 아녔습니다. 눈매가 많이 닮았습니다.

제주는 막둥이 해녀라 해도 환갑을 다 넘었다고 알고 있는데... 복순 씨는 많이 봐도 50대 중반 정도였습니다.

물질하느라 바닷물이 새겨 넣은 한 두 줄 눈가 주름만 아니면 채 50이 안되어 보입니다.

“ 물회가 너무 맛있고요. 복순 씨 너무 유명해서 한번 뵙고 싶었어요.”

“ 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님’도 그렇고 ‘복순 씨’도 그렇고 내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호칭입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안 소장이 성게칼국수도 먹자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루고 나왔습니다. 저의 작은 복수입니다.


가까운 곳에 ‘빛의 벙커’ 전시장이 있습니다. 10월부터 내년 3월까지 고흐와 고갱 작품을 상영(?)합니다. 수십대의 고해상도 빔프로젝트로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미디어아트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작품, 별이 빛나는 밤

  

높고 넓은 공간 전체를 스크린으로 활용해서 작품들을 영상 스토리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눈에 익은 대가의 작품을 하나씩 보여주는데,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요소들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주는 방식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40분이라는 시간이 금방 지났습니다.


성산에는 저의 인생커피가 있습니다.

2018년 4월 직장 동료 두 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제주일주를 했습니다.

그때 우연찮게 갔던 카페가 있었는데요. 그곳에서 저는 인생 커피를 만났습니다.

목포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찾아갔습니다.

   

카페 도렐(Dorrell)


너티클라우드 커피

                                                      

도렐의 시그니처 메뉴 ‘너티클라우드’입니다.

무심코 첫 모금을 넘기면 깜짝 놀랍니다. 묵직한 크림수프 같은 식감에서 놀라고 땅콩크림의 달고 고소한 맛에 당황하다가 끝에 찐한 에스프레소 맛으로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이거 머시여"

첫 모금에 놀란 안 소장은 비명처럼 한 마디 던지고 더 이상 마시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한 번은 더 마셔 볼  법 한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나도록 잔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너티 클라우드는 땅콩크림, 우유, 에스프레소가 힘을 합쳐 만들어냅니다. 작년에 신사동 가로수길에 도렐 육지 1호점이 생겨서 서울에서도 너티클라우드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용산(2호점), 성수동(3호점)도 생겼습니다.

나만 아는 커피 맛집, 제주도 성산을 가야 먹을 수 있는 인생 커피였는데 이제 육지 여러 곳에서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되었네요. 그다지 좋지만은 않습니다.  


   예상보다 1시간 30분 정도 늦어졌습니다. 표선으로 가서 몸국을 먹고 동백꽃을 보러 가야 합니다. 서귀포에 숙소를 정했으니 조금 서둘러야 합니다.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가시식당은 대중교통으로 가기에 힘든 곳입니다. 성산에서 서귀포가는 길 가운데 쯤 있는데, 중산간으로 약간 올라 가야해서 버스가 많이 없나봅니다.

도렐 카페로 카카오택시를 불렀습니다.


택시는 중산간동로를 따라 갑니다. 10여분 지난 후에는 띄엄띄엄 귤농장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 언덕에 있는 귤밭 보이시죠? 바닥에 하얗게 보이는 천을 다 깔아놨잖아요. 저게 타이벡이예요.”

“귤나무 밑에 펼쳐놓으면 일조량이 많아져서 맛있는 귤이 된다면서요.” 기사님의 말에 내가 아는 척을 좀 했습니다.

“ 네 맞아요. 근데 배수로 확보가 더 중요해요. 비가오면 비를 빨리 흘러보내고 수분관리를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언덕에 있는 귤밭에 저리 타이벡이 설치 되어 있는 거죠”


제주는 뭐니뭐니해도 감귤의 고장입니다. 제주 전체 감귤 생산량의 80%가 서귀포에서 재배된다고 합니다.    

근데 2019년, 올 해 감귤값이 폭락하여 상황이 좀 심각합니다. 지난 가을 제주에 세차례나 연속으로 불어닥친 태풍 영향이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열매가 익어가는 시기에 태풍과 잦은 비가 내려 노지감귤의 당도가 떨어졌고 가격 폭락으로 이어졌습니다. 타이벡 귤로 만회해보려고 하지만 노지감귤의 경우 생산원가 이하로 거래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확을 포기한 농가도 많고, 이미 수확한 감귤도 유통되지 않고 썩어간다고 합니다.

감귤이 상품화 될 수 있는 최소 기준은 8브릭스(brix,당도 측정단위) 이상 이라고 합니다. 10브릭스 이상이면 최상품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과일에 들어있는 당분, 과당(果糖)은 인체에 해롭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 논란이 아니더라도 ‘달다=맛있다’는 잘 못된 공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일은 저마다의 향과 맛을 가지고 있을텐데, 단 맛 만이 그 과일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공급자 중심의 논리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과일 100그램(g) 중에 몇 그램(g)의 당 성분이 들어있는 지로 판단하는 Brix는 세상 모든 과일의 다양성을 없애버리는 고약한 기준입니다.

유래없는 태풍과 가을장마 때문에 다소 brix는 떨어졌겠지만, 노지에서 제주의 바람과 태양으로 만들어진 감귤입니다. 그 시기 자연이 허락한 만큼의 맛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가시식당은 차가 지나다니는 삼거리에서 길 안쪽에 있습니다.

택시가 식당 바로 앞에 내려서 찾기는 쉬웠습니다.



오늘이 12월 4째주 일요일입니다.

가시식당에서 몸국에 두루치기를 먹고 싶었습니다. 옆에서 투덜데는 안소장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돌아섰습니다.


길 안쪽으로 40m만 들어가면 가스름식당이 있습니다. 가스름식당도 몸국과 두루치기를 맛있게 하는 현지인 추천 맛집입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가스름식당에 갔는데 내부 공사 중입니다.  

가스름식당 내부 공사중


쉽지 않습니다. 가시리 몸국은 쉽게 그 맛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가스름식당 맞은편에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귓전에 들리는 안소장의 잔소리는 덤 입니다.


#12. 표선 나목도 식당

나목도 식당은 3~4년 전에 건물 자체를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예전 노포(老鋪)의 느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맛은 이어 가겠지요.

나목도식당

나목도식당에는 몸국 메뉴가 없습니다.


두루치기를 주문했습니다. 전통 제주식 두루치기는 재료도 요리방식도 동일합니다.

먼저 양념이 고루섞인 돼지고기를 불판에 얹어줍니다. 2인분 고기양이 꽤 많아 보입니다. 두 세번 고기를 뒤집어서 잘 익힐 수 있게 해줍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주인장은 파무침과 삶은 콩나물이 담긴 그릇을 가리키며 “ 조금만 더 익으면 접시에 있는걸 넣어서 드세요” 한마디 던지고 갑니다.

몇 군데 가 본 제주식 두루치기 식당은 모두 그랬습니다.

양념된 고기가 철판에 적응할 만큼만 가이드하고 나머지 재료는 손님이 넣고 완성해야합니다.

두루치기 식당이 전통적으로 불친절해서 그런건 아닙니다. 하나같이 손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영화나 소설 중에는 간혹 작가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영화, 같은 소설을 보았지만 다양한 독자들을 통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작품들이 있지요.

독자들은 장면과 장면, 문장 중간에 들어있는 은유와 암시 그리고 복선을 읽어내고 작가와 시선을 맞추지만, 작가는 여백을 남겨 독자의 생각을 끌어내어 작품을 완성시킵니다.

몇 번을 봐도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들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주식 두루치기도 그렇습니다.

손님들에게 넘어온 파무침과 콩나물을 양념된 고기와 섞어서 먹어는게 좋을 지, 상추쌈에 나눠 담아서 먹는게 좋을 지, 고기 한 점에 파무침 한 번, 콩나물 한 번 얹어 먹는게 좋을 지. 손님이 조리의 마무리를 하면서 음식을 완성한다는 것은 음식맛에 손님의 책임도 있는 셈이지요. 내가 완성한 나목도식당의 두루치기는 어떻게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나목도식당 두루치기를 맛있게 한 일등공신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은 국사발에 담긴 순대국물이고 나머지 하나는 반찬으로 나온 멸치젓갈입니다.

“ 어.. 이 순대국은 내가 인정 안 할 수가 없네. 형 여기 맛집 맞소”

안소장 입에서 처음으로 맛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메뉴판을 본 것 같은데… 몸국이 없어서 그냥 두루치기만 시켰는데... 메뉴판을 찾았습니다.


‘순대백반을 같이 먹었어야 하는구나 아니 순대국수를 먹을껄.’

두루치기의 양념과 파무침의 자극을 깔끔하게 덮어버리는 진한 순대국물 한 숟가락.

진한 돼지사골에 순대를 삶아낸 듯 거무티티한 국물은 그 색깔만큼 무겁고 짙은 맛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밥이든 면이든 고기든 뭐가 들어 있어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최고의 순대국을 두루치기에 끼워주는 국물로 경험합니다.


모든 맛을 덮어버리는 이 진한 순대국도 멸치젓에 길을 내어줍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농익은 멸치젓은 가늘고 길게 순대국 맛을 뚫고 나왔습니다.

두루치기를 밥에 한 숟가락 떠 먹고 순대국물을 먹으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맛의 갈래가 펼쳐집니다. 거기에 누워있는 멸치젓갈 통으로 베어 물면 갑자기 바닷가에 서게 됩니다.

표선면 가시리에서는 두루치기와 순대국을 먹어야합니다. 멸치젓갈이 마침표 역할을 합니다.


겨울 제주는 노란 감귤과 붉은 동백꽃을 볼 수 있습니다. 검은 현무암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제주의 감귤과 동백꽃은 그 본연의 색깔이 더 짙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택시를 타고 제주 동백꽃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많이 나오는 ‘동백포레스트’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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