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기 위해 씁니다
영화나 연극을 본 뒤에 바로 리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써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즉시 써야 그때 느꼈던 감동이나 통찰을 글로 옮길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감정의 입체감은 모두 사라지고 앙상한 기억의 뼈대만 남게 된다. 생각은 발화점부터 소멸까지 어디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3차원 시뮬레이션 시스템이다.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쓰는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 책을 읽다가도 쓰고 일을 하다가도 뭔가 생각나면 그걸 미뤄두고 글부터 쓴다. 여행을 가서도 쓴다. 그렇게 쓴 글들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고 쓰다가 만 글은 에버노트나 메모장에다 적어 놓는다. '좋아요'가 몇천 몇만 개씩 쏟아지는 유명인사나 셀럽들에 비해 내가 올리는 글들은 형편없는 조회수를 기록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저런 글을 쓰고 또 쓴다. 그렇다고 페이스북 담벼락에 대고 바로 쓰진 않는다. 아주 간단하게라도 퇴고 과정을 거친다.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그렇게 글을 쓰느냐고 놀란다. 새 책이나 칼럼을 쓰는 것도 힘들 텐데 또 이렇게 과외의 글을 쓸 힘이 어디서 나오냐고 묻기도 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나는 왜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는 주의가 산만하고 건망증이 심한 편이다. 기억해야 할 날짜나 사람 이름은 물론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상념이나 감동도 까맣게 잊는 편이다. 그래서 메모가 필요하고 글이 필요하다. 가령, 지나가다가 눈에 띄는 간판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게 재밌다고 하면서 사진만 찍어 놓으면 그걸 왜 찍었는지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걸 찍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글을 쓰려고 가만히 앉아 생각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그 간판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간판 하나 때문에 어쩌면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도 있다. 그렇다면 일거양득 아닌가.
게다가 인생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팩트만이 아니라 감정과 분위기, 태도들도 있다.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어떤 에피소드와 만났을 때는 물론 누군가 나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의 느낌도 글로 써놓지 않으면 다시 기억하기 힘들다. 글을 씀으로써 그 사건은 기억의 왜곡이나 채색에 의해 다른 것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나의 안에서 만들어진 생각이요 글이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아무튼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게 낫다.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굴리고 좀처럼 꺼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천재들은 이런 식으로 어느 날 툭, 하고 굉장한 것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천재보다 둔재에 가까운 나는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생기면 그걸 붙잡고 씨름해야 뭔가 이야깃거리로 발전시킬 수 있다. 가만히 있다가 멋지게 짠, 하고 내놓는 건 나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좋은 글이든 싱거운 글이든 매일 쓰려고 노력한다. 그 어떤 기획이나 프로젝트도 단번에 완성되는 건 없다. 기억의 축적이 필요하고 증거가 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생각과 마음에서다. 이 글도 보령시립도서관에 와서 저녁에 있을 책쓰기 워크숍 특별 리뷰를 준비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잊지 않으려고 쓰게 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