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령 생활

역시 정혜신 선생이었다

'정혜신 작가와 함께하는 치유·회복 북토크' 후기

by 편성준


심리적 CPR이라 불리는 『당신이 옳다』를 정혜신 선생이 펴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였다. 시비를 걸어온 친구를 때려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은 아이가 나중에 울면서 엄마에게 했다는 이 말은 '내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내 편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마음속의 외침이면서 동시에 누군가 나에게 '공감'해 주었으면 하는 본능적인 바람이다. 정혜신 작가는 무조건 맞장구를 쳐주는 게 공감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상대방의 이야기를 깊게 들어주고 "너는 그랬구나. 나는 그렇진 않지만, 그래...... 너는 그랬구나." 하고 그를 개인으로 인정해 주는 자세에서 공감은 피어난다는 것이다.


어제 곡성 미실란에서 이동현 대표와 함께 생활하면서 '들녘의 마음'이라는 생태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탁환 작가에게 갔다.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정혜신 선생의 북토크가 열린다고 해서 예약을 해 놓았던 것이다. 카페에서 지인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혜신·이명수 두 분이 우리를 보고 화들짝 반기며 포옹했다. 세상에 존경하며 살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고 여기는 우리 부부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두 분이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게다가 이명수 선생은 김탁환 작가, 장석주 시인과 함께 내 첫 책의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던 은인이다. 우리가 다른 테이블에 앉으려고 하자 합석을 권하며 정혜신 선생이 미실란 카페에서 파는 귀리라테, 토란라테를 사주셨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은 우리는 케이블에 놓여 있던 빵에 손을 뻗어 우걱우걱 씹으며 라테를 마셨다. 마침 나타난 이나리 대표는 헤어스타일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 못 알아보다가 나중에 웃으며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은 필사책 형식이다. '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 출간 기념이라는 부제 밑에는 '정혜신 작가와 함께하는 치유·회복 북토크'라는 행사 제목이 쓰여 있었다. 정혜신 작가가 나오기 전 곡성 최고의 가수 남근숙 이사가 나와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을 불렀다. 생각해 보니 이 노래 가사를 제목으로 김탁환 작가가 소설을 쓰기도 했다. 사려 깊은 선곡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어 김탁환 작가가 나와 행사 개요를 설명하고 정혜신 작가를 호명했다. 정혜신 작가는 의자에 앉는 것보다는 서서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하면서 암막커튼을 거두어 달라고 했다. 커튼 뒤로 곡성의 들판과 하늘이 드러나자 강연장에 모인 110명의 사람들 입에서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지인이 감옥에서 '당신이 옳다'를 필사하며 치유를 경험했던 사연 덕분에 '손당옳'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6개월 간의 답답함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12월 3일 이후부터 대선 전까지 우리가 그토록 괴로웠던 이유는 '그들이 국민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마치 물건이나 그림차처럼 여겼기 때문'이라는 걸 정혜신 선생이 짚어주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나도 그래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힘들었던 거구나, 하며 최근 아내와 나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사람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몇 마디 말로도 이렇게 치유가 가능한 것은 정혜신이 주는 통찰이 그만큼 깨끗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정혜신 선생은 '당신이 옳다'를 읽다 보면 당연히 '나 자신'이 떠오를 것이라며 왼쪽의 글을 필사하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그걸 쭈욱 써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모인 글을 5년 후에 다시 읽어보면 세상 하나뿐인 나만의 책이 된다는 것이다. '손당옳'의 확장된 활용법이다. 정혜신 선생은 공감을 위한 두 개의 질문 '너 누구니?'와 '너 괜찮니?'를 잊지 말라고 했다. 제대 후 부모나 친구들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밥 먹을 대와 개 산책 시킬 때 말고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들 때문에 괴롭다는 사연에 이 질문들을 대입해 보면 너 누구니, 는 "그동안 그곳에서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내가 들어줄 테니 한 번 얘기해 봐."라며 그 존재에 집중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열리겠는가. 아들은 어떤 질문에도 단답형의 대답만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아들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 정혜신 선생은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아야'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비난이나 비웃음을 받지 않고 마음을 다해 들어준다는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파를 점령하고 TV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딸에게 다가가 발이라도 잡고 있는 게 소통의 시작이라고 일러준다. 우리 사회는 '자기 억압'의 대가로 성공을 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나를 지우고 사는 게 익숙해지면 나든 남이든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공감능력 역시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다.


강의장 뒤쪽엔 언제나처럼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아내를 지켜보는 이명수라는 든든한 존재가 있었다. 저 두 분이 서로 만나지 못했으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라고 아내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정혜신 선생이 얘기할 때마다 좌석에서 들려오던 아, 하는 깨달음의 탄성은 질의·응답 시간에도 여전했다. 아주 젊은 남성 연구자의 고민도 인상 깊었지만 가장 재밌었던 사람은 아내와 처제 등 네 명의 여성의 손이 이끌려 온 중년 남성이었다. 나도 손을 들고 소감을 얘기했다. 5년 전 정혜신 선생의 북토크에 와서 퇴사를 결심하고 그 직후 정말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하자 "난 저런 얘기 정말 좋아."라며 정혜신 선생이 웃었다. 정말 그 이후 내 인생은 변했고 내 옆에는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오늘의 강연은 또 한 번의 치유였다고 말하지 박수가 쏟아졌고 비로소 나를 알아보았다며 인사를 해오는 독자분들도 계셨다. 물론 들녘의 마음에서 인사를 해 온 반가운 분들도 계셨다.

역시 정혜신 선생이었다. 곡성의 폐교를 개조한 이 작은 강연장에 110명이 모인 것도 정혜신과 이명수라는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김탁환 작가는 페이스북에 '정혜신 선생님 이명수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식사하고 사진 찍고 걷고 울고 웃은 하루였다. 110명의 독자들이 모였고, 날은 더웠지만 구름이 무척 아름다웠다. 반 년 동안 낫지 않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을 다들 느꼈으리라 믿는다'라고 썼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정혜신, 이명수, 김탁환, 이동현, 남근숙 선생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희는 보령으로 잘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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