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연극은 계속 만들어진다는 믿음을 주는 작품

장진의 《불란서 금고 -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

by 편성준


유머는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투덜거림과 어긋남과 엉뚱함에서 온다고 믿는다. 장진 감독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태리 남자들 때문에 벌어진 졌던 유쾌한 보험 사기극 《꽃의 비밀》 이후 오랜만에 무대에 올린 장진의 신작 《불란서 금고 -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를 어제 대학로 서경스퀘어 스콘1관에서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역시, 장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한날한시에 은행 지하에 있는 금고 앞에 맹인, 교수, 밀수업자, 건달 들이 모여든다. 은행털이들 같긴 한데 거기 유니폼을 입은 은행 여직원이 끼어 있는 게 이채롭다. 이들은 전기가 꺼져 은행문을 열어도 경찰이 달려오지 않는 일요일 밤 12시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중이다. 건달은 은행 지하실이 너무 덥다며 화를 낸다. 은행의 상징이 뭐냐,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니냐,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덥냐, 우리 할아버지는 여름이면 은행 가서 살았다, 시원해서....... 은행 여직원이 대답한다. 은행 1층은 시원하지만 여기는 평소 잘 안 쓰는 지하라서 냉방이 시원치 않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덥다고 투덜대는 놈도 과하지만 거기다 대고 정중하게 설명을 하는 여직원의 모습 역시 이 상황에 썩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이런 어긋남과 엉뚱함에서 유머가 스멀스멀 시동을 건다.


맹인은 금고 전문가다. 그는 미국, 독일, 일본 등 전 세계 모든 금고를 다 열 수 있지만 불란서 금고는 영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댄다. 불란서 애들은 뭔가 하나를 꼭 덧붙여서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이 금고를 열 수 있다고 자신한다. 시력을 잃은 대신 청력을 얻었으므로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기에 일만 끝나면 바로 헤어지자고 굳게 다짐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꾸 자신의 비밀이나 과거를 야기하게 된다. 급기야 건달이 실수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나머지 멤버들은 신이 나서 그의 이름을 말끝마다 반복해 언급한다.


전작 《서툰 사람들 》에서도 확인했지만 한정된 공간에 인물들을 모아 놓고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서글프거나 허무한 반전을 선사하는 건 팔방미인 장진의 특기다. 이번 연극 역시 은행 금고라는 욕망의 상징 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간군상의 감정과 딜레마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한다. 맹인 역의 성지루를 비롯해 교수 역의 장현성, 미술품 밀수꾼 정영주, 건달 주종혁, 은행원 금새록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대사의 호흡도 착착 맞추는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순진해 보이는 여직원 복장과 표정으로 할 말 다 하고 문제의 '손가락' 장면에서 "혹시 몰라서......."라는 대사를 내뱉는 금새록 배우를 기억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관객들이 많았으리라. AI나 로봇 같은 신문물이 나오지 않아도 재밌고 짜임새 있는 연극은 계속 만들어진다는 믿음을 주는 이 연극을 강추한다. 장진은 단 한 번도 관객의 티켓 값을 아깝지 않게 해주는 작가이자 감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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