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인그리드와 '리터닝 군산 프로젝트'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이자 소설가였던 채만식은 '금강의 청류(淸流)가 서해와 만나 탁류(濁流)가 되는 지점'이 군산이라고 썼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쌀을 수탈해 실어 나르던 기점이 군산항이었기에 소설 제목으로라도 그렇게 화풀이를 해본 것이리라. 일본인과 중국인(청인)들이 모여들었던 1930년대의 군산에서 '짬뽕'이라는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졌다. 짬뽕은 중국 요리의 뼈대 위에 서로 다른 것을 뒤섞는다는 일본어 ‘찬폰(ちゃんぽん)’과 조리 방식이 덧씌워지고 여기에 남해의 싱싱한 해물,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춧가루와 매운 기운 등이 스며들며 지금의 얼굴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군산의 짬뽕은 단순히 얼큰한 면요리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일방성과 화교의 적응력이 조선땅이라는 그릇 안에서 타협한 근대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서두에 이렇게 짬뽕에 대한 이야기를 과도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군산이라는 도시가 '짬뽕'을 닮았기 때문이다.
군산에서 1박 2일을 보냈다. 공간에 관심이 많은 지인이 군산의 '호텔 인그리드' 숙박권을 선물하며 같이 하루를 보내자고 청했기 때문이다. 보령으로 이사를 온 뒤 군산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 서울에 살 때는 한길문고에서 북토크를 하느라 군산에 몇 번 온 게 전부지만 최근엔 군산 북페어도 2년 연속 참여했고(덕분에 책값이 많이 나갔다) 젤라또 매장 ‘노베오'의 기술 전수를 위해 군산에 내려와 있던 카카오봄 고영주 대표를 만나러 온 적도 있었다. 그때 호텔 인그리드를 둘러싼 '리터닝 군산(Returning Gunsan)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공유인 유한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정유미 이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군산 출신 오너셰프인 송성진 대표는 2010년 은파호수 근처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파라디소 페르두또'를 냈다. 레스토랑 공간을 설계해 준 사촌 형 손진 소장(이손건축 대표)과 "군산 사람들이 즐길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없어서 못 즐기는 거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번화하지 않은 조용한 동네에서 매일 공연이 열리는 재즈클럽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었다. 군산에 내려온 지 10년 만에 클럽이 들어서기 좋은 필지 하나를 발견했다. 점집과 미군 상대 업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영화동 모퉁이의 낡은 건물들이었다. 송 대표는 지인들과 법인(공유인)을 만들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공간의 설계를 손진 건축가에게 의뢰하였다. 손진 건축가는 건축물의 구조와 물성을 최대한 그대로 놔두면서 현대적인 감성을 입히는 방식을 선택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나 외벽, 높은 층고, 중정 등은 유지하되 내부는 재즈 바와 레스토랑, 젤라또 매장 등으로 기존 목조를 재조립한 것이다.
호텔 인그리드에 체크인을 하다 서교동 '몽로'에 있던 문현숙 지배인이 이 호텔에 매니저로 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호텔 내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정다웠는데 문 매니저로부터 이중 창문에 들어간 경첩 - 메이지 23년(1890년)에 창업 136년 역사를 이어온 일본 하드웨어 회사 호리상점의 솔리드 황동 소재- 가격을 듣고는 기절할 뻔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숨어 있는 고급스러움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방에서 좀 쉬다가 ‘카페테리아 트레비아’로 내려와 커피를 마시며 가게에 비치된 'SPACE'라는 잡지를 읽었다. 거기엔 충남대 윤주선 교수가 호텔과 이 지역의 역사와 발전 방향, 특히 '리터닝 군산(Returning Gunsan)의 의미에 대해 기고한 탁월한 에세이가 실려 있었다. 지인 커플은 젤라또 매장인 ‘노베오'에 다녀왔다고 한다. 이탈리아어로 'nove'는 9를 뜻하고 'o'는 숫자 0을 뜻한다. '구영길'을 음차해서 장난스럽게 지은 이름인 것이다. 네 명이 함께 들어간 이탈리안 레스토랑 '파라디소90'의 피자와 파스타, 와인은 훌륭했다. 샌드위치도 하나 먹었는데 빵의 질감이 매우 고급스러웠다. 지인은 마이클 프랜스의 평범한 음악도 따뜻한 조명과 다이닝 크루들의 움직임과 함께 하니 너무 잘 어우러진다며 감탄을 거듭했다. 여기가 군산이라는 게, 밖으로 나가면 당장 골목에 적산가옥들이 늘어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가 '지방 도시'라고 하면 의례 떠올리는 낡은 풍경과 회고적 푸근함의 정서를 가볍게 배반하는, 뭐든 거리낌 없이 섞어 조화를 이루는 '짬뽕스러운' 이 공간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지방이라고 값싸고 서민적인 공간만 있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장소가 어디든 제대로 차려 놓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호텔 인그리드와 그 주변 동선의 가게들인 듯했다. 이차로 간 '바 인그리드'는 구 조선은행 대들보를 바 테이블로 개조한 게 인상 깊었다. 이곳 역시 조명과 음악은 훌륭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위스키를 마셨는데 조대희 매니저의 손님 응대가 친절하면서도 세련되어 '또 오고 싶은 가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지금은 호텔과 재즈클럽 모두 가 오픈 상태지만 4월 중순경 '그랜드 오프닝'을 한다고 하고 곧 KTX도 개통되니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군산으로 모여들 것이다.
호텔에서 잘 자고 나와 트레비아에서 커피와 초콜릿을 음미하다가 정유미 이사를 만나 호텔 이름 '인그리드'에 대해 물었다. 군산은 우리나라 초기의 계획도시로 격자(그리드) 형태의 도로가 상징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리드(grid) 안에 있다, 라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지어졌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해 이름의 뜻을 헤아리는 인문학적 여행으로 마침표를 찍는 소중한 질문과 대답이었다. 호텔에서 조금 더 머물다 가겠다는 지인 커플과 인사를 하고 헤어져 주차장으로 갔다. 아내와 4월 오픈에 맞추진 못하더라도 꼭 다시 한번 방문하자고 다짐하며 차동차의 시동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