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지나도 술안줏거리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3살 터울의 남동생과 똑같은 디자인, 색상의 옷을 입고 찍은 촌스런 사진이 앨범에 한가득이다.
왜 그땐 똑같은 옷을 입혔는지…
설악산, 오대산, 부곡하와이, 수안보, 제주도, 경주, 전주 등 그 시절 유명한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진정한 첫 여행은 언제지?”
고3 수능을 본 그해, 1999년 1월 1일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떠난 2박 3일 여행이었다.
워낙 친하게 지냈던 정희, 용현, 나 셋은 서로의 부모님께 졸라서 새해 일출을 보러 정동진으로 여행을 갔다.
딱히 일출을 보고 싶다기보다 부모님께 당당하게 허락을 받고 친구들끼리 여행을 감으로써 어른에 한발 다가섰다는 기분을 느낀다고 할까?
1999년이면 성인이 된다는 사실,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여행이었다.
일단 일정은 대전역에서 청량리역,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역으로 가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고,
정동진 바다에서 놀다가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에 강릉역으로 가 강릉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기차표는 내가 예매를 하기로 했다.
모든 일정의 여행시간을 계산해서 가는 기차표와 돌아오는 기차표를 모두 다 구매했다.
그 시절 내성적인 19살들에게는 기차역에서 표를 사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땐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익숙지가 않았다. 기차표 사는 일조차도.
새벽에 대전역에서 만나서(부모님들이 역까지 데려다주신 걸로 기억한다.^^;;)
대전역에서 청량리역, 그리고 정동진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새벽에 일찍 출발하기도 했고, 기차 안에서 잠도 안 하고 조잘조잘 떠들며 온 우리는 일단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정동진역 근처의 민박집을 찾아갔다.
아침 일찍이라 민박집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약간의 네고 끝에 입실을 했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일출을 보러 나가 볼까 하는데, 저 쪽 구석에서 용현이가 기차표를 확인하는 도중 소리를 질렀다.
“야! 근데 왜 강릉 가는 기차날짜가 왜 1월 1일 9시지? 우리 내일 강릉 가는 거 아니었냐?”
“아 무슨 소리야! 줘봐! 이게 왜 1월 1일이야. 1월 2일…어? 진짜네..”
“아! 이 자식! 사고 쳤다!”
정동진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강릉으로 가야 하는데 날짜를 착각해 정동진에 도착한 날 강릉출발 기차표를 끊은 것이다.
난 이 놈들에게 붙잡혀 10분 동안 인디언밥을 두드려 맞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네. 그냥 일출 보고 이따가 9시에 강릉 가서 이틀 동안 놀자! 어차피 여기 보니까 정동진에서 할 게 아무것도 없어! 하하하하”
애들을 설득하고 짐을 다시 싸고 민박아줌마에게 갔다.
“사장님 죄송한데 저희가 기차표 시간을 잘못 봐서 9시에 강릉역으로 가야 되거든요. 들어온 지 10분밖에 안 됐는데 환불하면 안 될까요?
“네. 안됩니다.”
“해주세요!”
”안 돼요.”
결국 그렇게 환불을 받지 못하고 강릉행 기차를 탔다.
며칠 전 아저씨가 된 이 멤버 셋이 화상 술자리를 가졌다.
20년이 넘은 일이 그날도 멋진 술안주가 되었다.
“야 우리 그때 그렇게 놀다가 돌아오는 날 돈이 다 떨어져서 쫄쫄 굶었잖아. 그날 밤 저녁도 못 먹고 12시쯤 도착했는데 정희 어머님이 역까지 나오셔서 짜장면이랑 탕수육 사주신 거 기억나냐? ㅋㅋㅋ”
“아 그때 저시키가 기차표만 잘 끊었어도 돈이 남았겠지! 멍청도 불효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