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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l 08. 2024

에어컨이 던져 준 화두

나는 지금 에어컨을 앞에 두고 한숨짓고 있다. 고장이 나서가 아니다. 에어컨을 두고 벌이는, 전쟁 아닌 전쟁 때문에 이 여름을 어떻게 무사히 지나갈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보일러를 두고 벌어졌던 상황이 계절이 바뀐 틈을 타 고스란히 에어컨으로 넘어왔다.
신나게 샤워를 하고 있던 한겨울의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지던 냉수에 움츠러들다 못해 심장마비가 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급변한 물의 온도차를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던 그 밤처럼 말이다. 영하의 날씨에 원치도 않는 냉수마찰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샤워를 마치기도 전, 보일러를 끈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을 ‘켜는 자’와 ‘끄려는 자’가 공생하고 있다.

절대적 수치로 따지자면 '켜는 쪽'이 더 많다. 딸내미는 주로 선풍기로 여름을 나는지라, 에어컨을 켜는 자는 대체로 우리 부부와, 거실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는 아들내미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우리 집 동거인인 친정 엄마는 호시탐탐 에어컨을 끌 기회를 엿보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지난겨울 보일러를 끈 사람은 엄마였던 것이다.



비행기 소음 때문에 한여름에도 마음껏 문을 열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늘 문을 닫아두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데 여타의 가정에 비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다행히 이러한 고충을 살핀 국가가, 여름이 끝나고 나면 고맙게도 에어컨 사용 지원금을 계좌로 시원하게 날려준다. 그리하여 예전보다 우리는 전기세 걱정을 덜고, 좀 더 관대해진 마음으로 에어컨을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엄마의 마음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상황에 대해 여러 번 설명하고, 그것도 부족해 멀리 사는 동생에게까지 부탁해서 설득해 봤지만, 엄마의 마음은 천년 묵은 망부석처럼 꿈적도 하지 않는다. 아주 잠시,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다가도 정신적 요요라도 온 듯, 엄마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가 눈에 불을 켜고, 촉각을 곤두세운 채 에어컨의 진행 상황을 감시한다. 전기세와 에어컨 가열에 대한,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 불안과 걱정이 엄마를 그리 만드는 것 같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아들내미는 거실에서 에어컨을 ‘열대야 모드'로 맞춰 놓고 잠자리에 들곤 하는데, 야심한 시각, 거실 에어컨의 반짝이는 불빛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꿈쩍도 않고 서 있는 엄마의 시커먼 뒷모습을 부지불식 간에 맞닥뜨리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납량특집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아이고, 놀래라! 엄마,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전원 버튼 눌렀는데도 왜 이 놈의 에어컨이 안 꺼지나.. 고장 난 건가?”

미동도 하지 않는 뒤통수를 유지한 채로 엄마가 말했다.



그 순간 에어컨에는 큼지막한, '25'라는 숫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에어컨이 꺼졌으며, 앞으로 25분 동안 자체건조를 한다는 뜻이었다.

  "엄마, 어차피 시간 설정해 놔서 알아서 꺼져.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놔둬."

나의 말에도 엄마는 손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놓을 줄을 몰랐다. 마치 그것이 사수해야 하는,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위와 비슷한 대화를 엄마와 몇 번이나 나눴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열 번은 족히 되니, 아마도 실제 있었던 상황은 십수 번쯤 되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성인이니 감정을 조절하고, 엄마를 이해해 보려 애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쑥불쑥 뾰족한 마음이 솟아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엄마는 도무지 변할 기미가 안 보이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엔 인내심이 부족하다. 생각해 보면, 이 '불편한 동거'의 많은 갈등 상황이 그깟 전자 기기 때문에 불거진다. 세탁기, 조명, 에어컨, 보일러, 선풍기 등등....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자제품의 수를 줄여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태가 무마되기는커녕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에어컨을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이 이제 엄마와 초등학생 아들내미 사이로 번져가는 모양새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할머니를 이해해 보려 애쓰라고 설득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것은 어른인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자신의 집에서 에어컨도 마음 놓고 쓰지 못하게 하는 할머니가, 아이에게는 불편하고 밀어내고 싶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엄마가 슬그머니 에어컨을 끈 다음 날 아침이면 땀에 절은 아들내미는, 가뜩이나 등교를 앞두고 불편한 심기에, 짜증을 부려댄다.

  "엄마, 할머니한테 제발 에어컨 좀 끄지 말라고 해줘. 에어컨 틀고 있으면 할머니가 자꾸 에어컨 폭발한다고 끄려 하는데, 내가 (짜증이 나서) 폭발할 것 같아."



큰일이다. 에어컨이 폭발하기 전에 아이가 할머니 앞에서 먼저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를 눈앞에 둔, 점점 까칠해지는 손자가 할머니는 섭섭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마음껏 활용하고 싶은 '에어컨 지지'족인 나와 짝꿍은,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에어컨을 두고 벌어지는 불편한 동거인들 간의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느냐, 그것이 올여름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가장 큰 화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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