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정유정 작가의 이름을 접한 건, 중학생 아이들을 인솔해서 간 파주의 한 수련회장에서였다. 중간고사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었던 당시, 하루의 일정을 끝낸 교사들의 숙소는 세 부류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머리를 싸매고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이, 도란도란 수다를 나누는 이 그리고 각자의 침대에서 고요하게 독서를 즐기는 이들로.
나는 시험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창작이 필요한 일의 특성이 그러하듯,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도 ‘그분'이 오셔야 일이 막히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런데 마음이 급해서였는지 어땠는지, 그날따라 도무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편두통이 올라올 것 같은 가슴 답답한 상황에 몸부림치고 있던 와중이었다. 맞은편에서 평화로이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동료교사의 손에 쥐어있던 책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환자복을 입고 있는, 기괴한 포즈를 한 두 남성의 이미지 아래에 휘갈겨져 있는 큼지막한 제목이 내 심장을 쏘는 듯 확 들어와 박혔다. 그 작품이 바로,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자, 정유정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작품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소설 -특히 장편소설- 을 애정하는 내게 그녀의 작품은 잘 차려진 진수성찬과도 같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진이, 지니>, <완전한 행복>등, 글자들로 빼곡히 들어찬 페이지들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두께에 실려있는 작품들이지만, 장강명 작가의 말처럼 작품 하나하나가, 독자로서 '이 정도 두께의 책을 한자리에서 이 정도 속도로 읽'는 신공을 발휘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다.
‘욕망 3부작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인 이번 신작 <영원한 천국>은, 그녀의 첫 SF 도전작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SF장르를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그녀의 작품이기에 읽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번 김호연 작가의 북토크가 열렸던 서점에서 정유정 작가의 신작 북토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고, 지자체의 독서지원 사업 덕분에, 맥주, 작가의 북토크와 도서 모두를, 책 정가에서 10프로 할인된 가격으로 누리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정유정 작가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로 북토크를 시작했다.
그녀는 말한다. 인간에게는 '욕구'와 '욕망'이 있으며, 단순히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넘어 그 욕구가 '내 삶을 걸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갈 때에 욕망이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욕구에서 진화한 욕망이 이 세상의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욕망의 간절함이 수반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으며,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한 성취욕을 일궈낼 수 있다고도.
정유정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번 소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정한 언니'에 의해 쓰인 작품이다. ‘파괴적 욕망'을 다룰 때 무서운 언니가 된다는 그녀는, 작품 속 캐릭터를 어떻게 구상하느냐는 독자들의 질문에,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한 면모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끌어낸다고 답했다. 자기 안에서 본 진실을 말해야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있었기에 <종의 기원>의 유진, <7년의 밤>의 영제와 같은 실감 나는 악역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었다.
SF장르에 속하는 이번 작품은, '발전하는 과학에 대한 두려움'이 모티브가 되었다. 공포스러울 만큼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과학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가장 큰 힘이 '야성'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이번 작품 속에서, 과학의 이기가 지배하는 미래 세상에서 야성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아직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그녀는 5~60권의 - 평소에는 3,40권 정도의 책을 참고한다고 - 책을 읽고, 1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의학적 지식이라고는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인지 신경학'을 공부하고, 작품의 공간을 실감 나게 그리기 위해서 홋카이도의 유빙 지대인 '아바시리'를 (편집장과 함께) 답사하고, 이집트의 ‘바하리야’ 사막을 다녀왔다. 그녀가 독자들에게 추천했던 <숲 속 수의사의 자연일기>가 이번 소설에 영감을 주었으며, 일본에 있는 100년 된 형무소가 작품 속 핵심적 공간으로 등장하는 재활원인 ‘삼애원'의 모델이 되었다.
소설 한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고, 공부를 하며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새삼 깨닫게 해 준 대목이었는데, 한편으론, 출판이 기정 사실화된 상황에서 출판사 편집장과 함께 답사를 다녀오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녀가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바시리의 유빙이 선사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편집자 곁에서, 그곳의 어느 풍경에서 어떤 캐릭터를 죽일까, 고심하고 있었다는 작가는, 재미와 힘 그리고 의미가 있는 '궁극의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완전한 행복> 이후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거의 공황상태까지 갔던 고통을 딛고, 그녀가 다시 이야기꾼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다시 쓰고자 하는 그녀 내면의 욕망 덕분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내 안에 숨겨진 욕망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녀처럼, 규범이나 규율로 내 안에 봉인되어 있을 또 다른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여느 때와 다르게, 첫 문장이 벼락처럼 그녀를 찾아왔다는 <영원한 천국>또한, 오백 페이지를 훌쩍 넘어가는 길이를 자랑한다. 이제 겨우 도입 부분을 읽고 있을 뿐이지만, 그녀가 직접 소개해준, 주인공들이 탄생한 배경 이야기를 곱씹으며 즐거운 독서를 이어가려 한다.
바쁜 일상에 부담을 안겨줄 정도로 두꺼운 책이지만, 북토크 후에 맞이할 작품은 분명, 배경지식 없이 시작되는 만남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다. 무릇 아는 만큼 보이는 세상이니 말이다.
더위기 물러나기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가을,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오래간만에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련다.
그녀의 첫 작품과 처음 만났던, 파주의 한 수련원에서 동료교사가 내게 보여주었던 그 여유로움을, 마음껏 음미하며.
*실제 데뷔는 청소년 소설인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2007)로 했으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 <내 심장을 쏴라>(2009)가 체감상 본격 데뷔작으로 느껴진다.
-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그녀의 작품은 <종의 기원>이다.
이번 북토크의 Q & A 시간에서는 <종의 기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그것은 <종의 기원>의 프롤로그에 관한 사실이었다.
한국판 <종의 기원>에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프롤로그 부분이 있는데 반해, 미국판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 그 이유는, 피로 낭자한 충격적인 도입부를 '문학적 장치'로 희석시키고자 한 한국의 출판편집자와, 프롤로그의 '종교적 색채'를 들어내고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하길 원했던 미국의 출판편집자 때문이었다고.
미국판의 제목은 <종의 기원>이 아닌 <The Good Son>이다. 마치 과학책을 연상시키는 제목이 미국 쪽의 요청으로 완전히 다른 제목으로 변경된 것이다. 우리말로 "착한 아들"로 번역되는 제목이라.. 이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많은 국내독자들과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역시, 제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편집자의 요구 사항에도 그 사회의 가치관이나 분위기가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던 에피소드였다.
- 작가는 신작 제목을 생각하며 <영원한 천국> 대신 <영원한 지옥>으로 지을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별다른 사건 없이 평탄하게 이어지는, 끝이 없는 삶은 지루한 천국이자, (작가에게는) 지옥과도 같이 느껴졌다고도.
그러고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지루함'은 고통이자 고문처럼 다가올 것 같다. 우리가 끊임없이 일상을 탈출해 여행을 떠나고, 이직을 하고, 덕질에 빠지며,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는 것도 결국, 지루함에서 뻗어 나오는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
- 2년 후쯤 발표될 차기작은 그녀 내면의 '무서운 언니'가 써내려 갈 모양이다.
그녀의 반가운 예고에 기대감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독자로서의 나는, '다정한 언니'보다는 '무서운 언니'로 다가오는 그녀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