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초저녁의 날이 이어지고 있다.
밤공기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어코 옷을 껴입고 운동화에 발을 들여놓는다.
마음껏 생각하거나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산책의 시간은, 움직이고 있으되 휴식하고 세계와 접촉하되 오롯이 홀로 있을 수 있는 묘한 시간이다.
풍경과 사람들을 끊임없이 지나치지만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한다.
외부와 차단한 채 마음의 굴곡을 어루만지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생채기와 마주하기도.
그렇게 마음의 성벽을 두텁게 쌓으며 걷다가도 타인의 어떤 인상적인 움직임에 한 번 마음을 빼앗기면, 그 벽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온 신경을 집중한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집 앞 운동장에는 잔디 축구장이 있는데 내가 나가는 시간과 고등학교 축구부의 시합 시간이 겹치는 날이 종종 있다.
나는 육상트랙을 따라 총총 걷고 학생들은 그 가운데 축구장에서 시합을 하는 거다.
처음 걸을 땐 경기장에서 움직여 뛰고 있는 선수들밖에 보이지 않더니, 한바퀴 두 바퀴 계속 돌고 그 풍경이 익숙해지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벤치 주변에서 준비운동을 하는 후보선수들.
바지런히 움직이기에 곧 경기에 투입되려는 선수들인가 보다, 했는데 그들은 끝끝내 경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얼마나 속이 상할까. 특히나 운동선수들은 승부욕이 강해 더욱 그럴 테지.
매 순간이 경쟁일 운동선수들의 생활에 참 괴롭고 힘들겠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올 무렵, 뒷정리를 하던 그 후보선수들의 해맑은 표정이 말해주었다.
_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죠.
_경기에서 직접 뛰는 선수가 있으면 벤치에서 쉬는 선수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_진짜 뛰게 될 날을 기약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연습하는 수밖에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건 있지 않느냐고,
기회가 왔을 때 꽉 잡을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건 바로 지금이라고 그들의 널따란 등짝이 말해주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마음 가는 대로 해보았던 일련의 것들이 점으로 선으로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걸 상기하며 그들이 몸으로 들려준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벤치에 앉아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직접 뛰지는 않지만 경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후보선수들.
언제 들어갈진 모르지만 몸을 풀면서 언젠가 다가올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던 그들의 자세만 기억한다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도 꽤 근사하겠다 싶어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사다 마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말없이 묵묵했던 주니어 시절 김연아와 같이,
운동장에서 본 후보선수들의 모습과 같이,
오늘도 내 몫의 일을 해내며 조용히 나아가자고 소곤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