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 체호프가 말하는 범속성의 악
출처: 소담출판사, '다락이 있는 집' 수록, 번역가 류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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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 과연 그때 그는 사랑을 했던가? 과연 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이라도 아름답고 시적이거나, 교훈적이거나, 그도 아니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도 있었던가? 그래서 그는 그저 불분명하게 사랑에 대해,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 누구도 무슨 일인지 짐작하지 못했으며 그저 아내는 자신의 검은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지미뜨리. 당신에겐 멋쟁이 역할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언젠가 그는 그의 동료인 관리와 함께 박사 클럽에서 나오면서 자제력을 잃고 말했다.
"자네는 내가 얄타에서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와 사귀었는지 모를 거야!"
관리는 썰매에 앉아 출발하려던 손을 멈추고 소리쳤다.
"드미뜨리 드미뜨리예비치!"
"왜 그러나?"
"그런데, 최근에 자네가 한 말이 옳았네. 썩은 냄새나는 철갑상어 고기 말이야!"
그토록 평범한 이 말들은 왠지 갑자기 구로프를 괴롭혔고, 저질스럽고 불결하게 느껴졌다. 이런 야만적인 도덕성이라니, 이런 인간들이라니! 이런 멍청한 밤들과 이렇게 지루한 날들이라니! 미친 듯한 카드놀이, 과식, 폭음, 매일같이 반복되는 대화 이런 것들은 가장 좋은 시간과 가장 좋은 힘들을 빼앗아 가 버리고 마침내는 제한되고, 창조력 없는 는삶과 중독 상태에 빠져 정신병원이나 수인 부대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구로프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고, 괴로워했으며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에도 잠들지 못했으며, 침대에 앉아 있거나 이쪽저쪽 구석을 왔다갔다했다.
* 소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
2024년 4월, '러시아문학기행' 수업에서 석영중 교수님과 함께 읽었던 소설이다.
최근에 체호프의 단편집인 '다락이 있는 집'을 읽으며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던 이 단편을 다시 읽었다.
체호프는 이 소설에서 계속해서 범속성에 대해 말한다. 범속성(Banality)은 그에게 악의 한 측면이다.
폐쇄적이고 낙후된 러시아 지방 소도시에서, 위선적인 경건주의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의사가 된 체호프는 "나는 평생 나의 몸에 흐르는 노예의 피를 짜내려고 노력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노예의 피란 자신의 족보가 아닌, 자신의 노예적 태도, 즉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반복하고 남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남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톨스토이와 같이, 타인의 의견에 좌우되고 본인을 직시하지 못하며 평균적이고 진부한 삶만을 지향하는 '범속함'을 끊임없이 경계해 왔다.
소설의 표면적 플롯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다. 불륜과 가벼운 만남이 난무하던 20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흔히 있을 법한, 어느 휴양지에서 안나라는 젊은 귀부인과 일시적이고 정열적인 만남을 갖는 구로프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안나는 구로프가 큰 감정 없이 습관적으로 사랑해 온 다른 귀부인들과는 달리 초짜였고, 구로프와 관계를 갖자마자 자신이 저속해졌다고 믿으며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어린 연인 옆에서 구로프는 태연자약하게 수박을 잘라먹는다.
어찌 보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도 꽤 비슷하다. 실제로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긴밀한 사이였으나 후에 갈라졌다고 한다. 이 소설만 봐도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확연히 보인다.
어찌 보면 교조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도덕과 종교를 강조하는 톨스토이와 달리, 체호프는 구로프에 있어서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그에게서 한 걸음 거리를 둔다. 소설 내에서 종교의 ㅈ도 언급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체호프는 당대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범속함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지적하기보다는 세심한 상황과 배경 묘사를 통해 은근하게 드러낸다.
얄타라는 공간 자체가 범속함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얄타는 럭셔리하고 환상적인 휴양지가 아니라,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여러 남쪽 휴양지 중 한 군데일 뿐이다. 소설에는 지속적으로 얄타의 먼지, 무더위, 지루함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얄타 사람들 의복의 특징은 두 가지다. "나이 지긋한 중년 부인들이 아가씨들처럼 젊게 차려입었고 장군 제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이 문장 하나만으로 독자는 얄타라는 휴양지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 안의 만남이라는 것은 얼마나 가볍고 범속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만남과 이별을 들여다보아도 그렇다. 대단히 운명적이고 신파적인 것처럼 그들 자신은 말하지만, 체호프와 함께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사실 그들의 사랑이란 지극히 진부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나와 구로프는 선착장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녀의 질문들은 너무나 평범한 것이어서 그녀 스스로도 무엇에 대해 물었는지 잊어버릴 정도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낼 때 그녀의 방은 아름답고 포근하다기보다는 '후텁지근했고, 그녀가 일본 상점에서 샀던 향수 냄새가 풍겼다'.
또한 소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색은 회색으로, 구로프가 안나를 잊지 못해 온 안나의 도시인 C도시에서 그는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에 투숙했음에도 '바닥은 온통 회색 군용 양복지로 깔려 있었고, 탁자 위에는 모자를 든 손을 높이 쳐든 머리가 파손된 기마상과 함께 먼지로 회색이 된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다. 로맨스라고는 없다. 구로프가 찾아간 안나의 집에는 회색의 긴 울타리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는 하루 종일 울타리 옆을 서성대며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미 자신을 잊었고, 벌써 다른 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을 시작했을지 모를 일이며, 이것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저주받을 담장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젊은 여자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로프는 습관적으로 여러 여성과 불륜관계를 맺어 온 인물이고, 현실인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져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일상의 공간 얄타에서, 이전의 여성들보다는 좀 수줍어하는 안나와 새로운 불륜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안나가 함께 밤을 보낸 후 자신이 저속한 여자가 되었다며 울어 대는 것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는 우는 안나를 내버려 두고 수박을 잘라먹는다.
왜 하필 수박일까? 당시 구로프가 살던 모스크바에서 수박은 굉장히 비싸고 이국적인 과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박의 산지인 얄타에서 수박은 굉장히 저렴하고 흔한 과일이었다. 즉 여기서 수박이란 구로프가 지내던 현실인 모스크바에서의 삶과는 다르게, 새로운 도파민을 주는 요소지만 얄타라는 공간과 구로프의 이면적 삶을 생각해 보면 평범하고 따분할 뿐인, 얄타 길바닥에 널린 커다란 수박덩이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만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수박은 한 번에 집어 깔끔하게 입에 넣을 수 있는 포도, 사과와 같은 과일과 다르게 물도 많고, 씨도 많이 나와 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좀 구차하고 게걸스러워지게 되는 과일이다. 눈앞에 사랑하는 여자가 울고 있다면 먹을 만한 그런 과일은 아니다. 체호프가 구로프가 먹는 과일로 수박을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파 드라마 등장인물처럼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우는 여자 옆에서 우적우적 물이 나오는 수박을 씹어먹고 이를 핥아 가며 씨를 접시에 뱉어내는 남자의 모습이란.
구로프와 안나는 각각 그들의 범속한 삶, 즉 모스크바에서 남편 드미뜨리를 '지미뜨리'로 발음하는 부인과 살아야 하는 삶과 C도시에서 회색 울타리를 쳐다보며 부자이지만 안나가 보기에는 남의 '하인'인 남자와 살아야 하는 삶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얄타로 온다.
그러나 얄타에서 그들의 만남 또한 더없이 범속한 것이었다. 안나가 조금 낯설어했단 것만 제외하면.
이때껏 만난 다른 여성들처럼 안나도 금방 잊을 줄 알았던 구로프는 시간이 갈수록 안나와의 기억이 점점 더 강력해지기만 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에게는 모스크바에서의 삶, 박사 클럽에서 교수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레스토랑을 다니는 삶이 견딜 수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 감정의 절정에서 나온 장면이 바로 필사한 부분이다. 구로프는 안나와의 특별하고 단 한 번뿐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동료인 관리는 최근에 먹는 철갑상어 고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니! 그 순간 그는 일상의 범속함, 그 범속성의 악, 그것이 얼마나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낀다. 내가 어제 먹은 철갑상어 고기란 얼마나 썩은 내 나는 것인지.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지인들과 모임을 하고 돌아올 때, 지극히 평범하고 나쁠 것 없는 대화들이었고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모임과 일상이 갑자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느껴지고 밀려오는 허무감에 견디기 어려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바깥 음식이 내 속을 니글거리기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랜 대화에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범속함이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와 체호프가 그렇게나 탈피하려고 했던 노예적인 삶의 태도다. 자리를 망치지 않기 위해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도 대충 맞장구를 치거나, 웃어른의 농담을 애써 웃어넘기거나, 적당히 가벼운 대화 주제를 찾아서 애써 늘어놓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 이런 순간들은 일회적이고 특별한 개인의 것이었던 삶을 진부하고 평균적인, 남들의 기준에 적당히 맞춘 삶으로 전락시키고, 죽음과 일회적 삶의 의미를 직시하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범속함으로 가득한, 어쩌면 범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는 톨스토이의 해답과 체호프의 해답이 다른 듯 같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은 병세로 침대에 누워 자신의 범속한 삶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지막 순간 아들과 손끝이 스치며 가족을 용서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다. 후대로 이어지는 사랑을 통한 해소다.
이 소설에서 안나와 구로프는 다시 만나지만, 안나의 눈물과 집착은 멎을 줄을 모르고, 구로프는 여전히 대충 그녀를 달래기만 한다. 그래서 그들의 만남도 그저 그런 범속한 만남으로 끝을 맺는 줄 알았으나, 마지막 두 페이지에 아름다운 반전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구로프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그녀를 달래기 위해 농담을 하려는 순간, 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의 머리칼엔 벌써 흰머리가 서려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흥분에 떠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본다. 그가 느낀 감정은 측은함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 또한 이제 곧 퇴색하고 시들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구로프는 더없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체호프의 해답은 연민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필멸자라는 거다. 지금의 아름다움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빛을 잃고 우리는 모두 초라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가련함과 애틋함을 느낄 수 있다. 구로프는 자신이 지금껏 숱한 여자를 만나 왔지만, 백발이 나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드디어 사랑을 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 사랑은 금지된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닌 가족, 부부,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 같은 사랑이다. 즉 함께 늙어가는 동반자에 대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 그 사랑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그가 진실되며 부드러워짐을 느낀다.
소설의 말미에 쓰여 있듯이, 그러한 사랑의 길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며, 그들은 그 길을 이제 막 접어들었을 뿐이다.
범속하게 살기란 쉽다. 그러나 진정 자유로이 살기란 어렵다. 항상 깨어 있으려 노력하고, 타인을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하며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는 문학도들이 평생에 걸쳐 희구해야만 하는 길이라고 체호프는 말하고 있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