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엄마는 엄마가 되었고 서른, 엄마는 이혼녀가 되었다.
갓 스무 살이 되어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학창 시절엔 하지 못 했던 화장과 예쁜 옷들을 골라 입던 나를 보며 엄마는 ‘꽃피는 청춘’이라 말했다. 뭘 해도 예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장 예쁠 때라며.
엄마는 흔히 말하는 고졸이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똑똑하기까지 했지만 그 시대의 여자에게 대학은 사치라며 할아버지는 엄마의 날개를 꺾었다. 고등학교마저도 당시 엄마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이셨던 은사님의 설득 끝에 겨우 보낸 거였다고 했으니 무사히 졸업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고 했다. 인문계에 갈 충분한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문계까지는 절대 보낼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호통에 엄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엄마는 큰 이모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 일을 시작했고, 부산에서 아빠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외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세기의 결혼이었건만, 엄마와 아빠의 인생은 그들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희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엄마의 임신 소식이었다. 아빠는 첫 아이 소식에 한껏 들떠 보였다고 했다. 가족이 없었던 아빠는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고,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자식에게 모두 쏟아주고 싶어 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첫 임신, 첫 아이, 첫 출산.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던 엄마는 아이를 보는 것은 서툴렀지만 사랑만큼은 그 어떤 샘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었다. 비록 아기 때의 기억은 전혀 나질 않지만, 여전히 집 한구석에 다 낡아 너덜 해진 사진첩 속의 엄마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난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그 후로 나는 3살 터울의 남동생이 생겼고,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고 먹고 싶은 것은 모두 먹으며 나름 유복하게 자라왔다. 몇 해 살지도 않은 인생이었건만, 이렇게 사는 정도면 나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쯤 불행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빠의 사업이 휘청였고, 그 과정에서 우리 집은 빚더미에 앉았다. 아빠는 우릴 버리고 홀로 야반도주를 했고 집엔 어린 나와 나보다 더 어린 동생, 그리고 어렸던 엄마만이 남아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고 또 시달렸다. 온 집 안에 붙은 빨간딱지,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 낯선 공기에 엄마는 마른 나뭇가지의 잎처럼 퍼석하게 메말라갔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던 나는 혹여라도 아빠처럼 엄마가 우릴 버리지 않을까 하며 마음을 졸이곤 했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엄마가 우릴 데리고 기차에 올랐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용인 시골의 외할머니댁이었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넷째 딸의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는 당신의 딸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평소 잘 입지 않던 정장을 빼입고 아빠의 소식이 닿은 곳까지 불편한 몸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당신이 도와줄터이니 집으로 돌아가 가정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빠는 끝내 할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렸다. 뿐만 아니라 나와 동생은 고아원에 맡기라며 자신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모진 말들을 내뱉었고, 그 무책임한 모습에 생채기가 나고 가슴에 피멍이 들어버린 딸을 먼 타지에 홀로 두고 올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너의 그늘막이 되어주겠다고. 비록 여자에게 공부는 사치라며 엄마의 날개를 꺾어 주저앉혔지만, 궁지에 내몰린 딸을 외면하는 비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너랑 네 새끼들은 어떻게든 보살펴주마.’ 그 말에 엄마는 아빠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우리와 함께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시골로 향했다. 많다면 많고 어리다면 어린 서른. 엄마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애 둘 딸린 이혼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