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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첫날, 어려운 교사되기 어렵네

시종일관 무표정은 필수!

by 망구리즘

8시 20분에 가까스로 학교 정문에 도착하는 내가 7시 20분에 교실에 도착했다.

오늘 반드시 결판을 보겠다는 듯 결의를 다지며 새로운 반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24개의 책상과 텅 빈 뒷 게시판. 지금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아이들과 새로운 1년을 꾸려갈 곳이자 전쟁터다.


앞문과 뒷문에 아이들의 번호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붙이고 중앙칠판에는 이종대왕의 4원칙을 붙여두었다.

5년 내내 잘 썼던 ’ 환영합니다 ‘ 말이 적힌 알록달록한 가랜드는 과감히 포기했다. 더 이상 아기자기하고 친절한 교사는 없다.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독서를 하거나 교과서를 읽으라는 첨언과 함께 칠판은 여느 때보다 간결하게 채워졌다.


단호하지만 친절한 교사를 모토로 삼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단호’는 묵음으로 사라지고 ‘친절한’(만만한)만 남아버린 교사는 힘이 없다.

뭘 해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못 듣는다. 말대꾸는 습관이며 언제 폭발하나 단계별 실험이라도 하는 듯 점점 기어오르다 분노하게 만든다.

졸업식을 향해 달려갈수록 고삐 풀린 망나니가 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새 학기에 말랑하고 유들했던 내 모습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게 다 내 탓이오, 내 업보요 라는 심정으로 지난 몇 개월을 견뎌왔다. 그리고 지난날을 교훈 삼아 25년 3월 4일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오늘만큼은 아니 적어도 한 달 동안은 화려한 무표정을 선보이며 누구보다 대하기 어려운 선생님으로 보이기를 애써야지 하는 다짐이 속에서 불처럼 들끓었다.


8시 20분이 되자 하나, 둘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입장한다.

누가 들어오든 말든 신경 안 쓴다는 시크한 분위기로 컴퓨터만 보고 있었다. 앞에 나와 인사를 해도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고개만 까딱했다.

원래 같았으면 어유~ 인사도 잘하네 감동받아 눈웃음과 사근사근한 말씨로 인사해 줬겠지.

칠판에 적힌 자리표를 보고 어버버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아이들은 조용히 칠판에 적힌 대로 행동했다.

낯섦과 어색함에 압도되어 당황하는 모습과 그럼에도 하란대로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쾌감이 일었다.


‘첫 시작이 좋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 앉은 아이가 수학책을 보고 있다.

그냥 슥슥 넘기며 보기만 한다. 뭘 보는 거지? 눈으로 암산하나?

“수학책 말고 사회나 국어 교과서 봐라”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다. 이종대왕의 4원칙 중 하나, ‘아침시간은 조용히’만 지키면 된 것이다.


침묵의 007처럼 고요했던 아침 자습시간이 지나고 아침 방송이 시작됐다.

애국가를 부른다. 쭈뼛쭈뼛 서로 눈치만 본다. 6학년이라고 부끄럽나 싶었다.

내가 애국가를 크게 불렀다. 사실 내가 제일 부끄럽다. 나는 13살 보다 16살이나 더 많으니까.

첫날은 기세다!라는 생각으로 뒷짐 지고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불렀다.

아이들의 소리가 점점 커진다.


방송은 15분 만에 끝났다. 교장선생님은 사석에서는 말이 기신데 방송에서는 최대 2분이다.

나머지 25분은 교실에서 지켜야 할 ‘4원칙 소개’와 ‘선생님 퀴즈’를 했다. 절대 웃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한 명 한 명 아이컨텍하며 설명했다. 강렬한 눈빛 공격에 깨갱 고개를 숙인다. 짜릿하다. 완벽한 직접교수법이었다.

‘용기 있게 인정하기’ 원칙 소개에서는 단톡방 관련 학교폭력 이야기도 강조했다. 6학년 여자아이들은 뒷담화, 사이버 폭력의 가능성이 높기에.

선생님 퀴즈에서는 ’ 손들고 말하기‘ 원칙을 연습했다.


2교시는 ’ 자기소개서 쓰기’ 활동이다. 주어진 30분 동안 “다 했어요”라는 말은 없으며 빨리 끝낸 사람은 내용을 보충하든 글씨를 다시 예쁘게 쓰든 글쓰기를 연습하라고 했다.


3교시는 ‘삼각 이름표 만들기’다. 마찬가지로 주어진 30분을 꽉꽉 채워쓰라고 했다. 삼각이름표를 들고 한 명씩 사진을 찍고 책상 오른쪽에 붙였다.


4교시는 각종 통신문 배부, 하이클래스 가입을 했다. 사비로 산 L자 파일에 정성스레 번호와 이름까지 써서 나눠줬다. 받으며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라고 했다. 교사가 준비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또 감사함은 표현해야 나도 너도 알기 때문에.

급식지도까지 꼼꼼히 했다.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남길 수는 없어서 꾸역꾸역 다 먹었다.

아이들이 하교했다.


하루종일 웃음을 참고 무표정을 하고 있느라 진이 다 빠졌다.

귀엽고 예쁜 모습을 보면서 마음껏 웃지 못하는 것도 고역이다.

그래도 1년을 형통하게 보낼 수 있는 투자가 한 달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내일도 무표정을 장착하며 어려운 선생님이 되길 다짐한다.


교사에게 제대로 된 한 해의 시작은 3월인 듯하다.

3월이 되어 다시 잘해보자 스스로를 격려한다.

’다시‘라는 말은 신기한 말이다. 전에 못했어도,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어도 이번에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말이자 기회의 말이다.

지난해보다는 조금 더 나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

조금 더 나은 교실이 되지 않을까를 기대하는 마음.

결국 그런 마음이 다시 나를 일으킨다.

아무쪼록 모든 선생님들이 3월 한 달을 잘 보내시기를 마음 깊이 응원한다.

선생님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아이들에게는 더 좋은 것들이 흘러가기 마련이니깐.

상부상조! 누이 좋고 매부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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