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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0. 2019

바깥에 있는, 그러나 유일한

<이방인>, 알베르 카뮈


존경하는 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제주도에서 혼자 여행을 즐기던 때였다. 제주에 정착한 친구 집에 가져갈 케이크를 구입하려고 주차를 하는 중에 전화를 받았다. 잘 믿어지지 않았고 어지러워 속이 메스꺼웠다. 지인의 부고는 곧장 나를 충격했고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나, 나는 여행 중이었다. 제주는 더할 나위 없는 가을이었고 이제 곧 친구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차 안에 앉아서 30분 정도를 갈팡질팡했다. 조금 전 들은 죽음의 소식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슬픔의 의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곧장 케이크를 사서 얼굴만 봐도 즐거운 친구의 집으로 향해야 하는가? 망연자실한 나는,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슬퍼하겠느냐고. 지인의 죽음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느냐고. 슬퍼하는 내게 슬프지 않은 나는 묻고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죽음에 관해, 죽음 뒤에 따라오는 슬픔에 관해, 죽음이라는 의례에 관해 나는 바깥에 있었다. 남은 2박 3일간의 제주여행을 나는 잘 마쳤다.    


소설 <이방인>(1942, 알베르 카뮈)은 뫼르소(Meursault)라는 낯선 인물을 소개한다. 그는 말이 없고 내성적인 인물로 평범한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일하고, 먹고, 담배를 태우며, 애인과 잠을 자는 등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다소 밋밋하고 지루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뫼르소가 어떻게 <이방인>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독자들은 왜 소설 속 뫼르소를 낯선 인류처럼 느끼게 될까?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나눠지는데, 1부는 모친의 죽음을 전해들은 뫼르소가 장례식을 치른 며칠 후 우연한 사건에 말려들어 아랍인을 살인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2부는 감옥에 갇힌 뫼르소가 여러 차례의 심문과 재판을 통해 사형판결을 받기까지의 모습을 그린다. <이방인>은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듣는 뫼르소로 시작해서, 자신의 죽음을 선고 받는 뫼르소로 끝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슬픔  이방인 - 감각하는 뫼르소

소설은 뫼르소가 모친의 부고(訃告)를 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요양원에 있던 엄마가 죽은 것이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요양원으로 가는 뫼르소는 무덤덤하다. 무관심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면식도 없는 먼 친척의 죽음이라도 되는 듯, 뫼르소에게서는 어떤 슬픔의 잔해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안치되어 있는 엄마의 시신을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관리인에게 함께 담배를 피울 것을 제안하고, 관리인이 권하는 까페오레를 음미한다. 뫼르소는 관례에 따라 요양원에 있던 다른 노인들과 밤을 지새우지만, 피곤한 듯 잠을 자는 등 망자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심하다. 다음 날 장례행렬 중에 내리쬐는 햇볕은 그에게 너무 뜨겁고,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을 뿐이다. 장례식을 마친 후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뫼르소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가 알제의 불빛 둥지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 가서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잠을 자리라고 생각했을 때의 나의 기쁨.”(24)     


드라마 <비밀의 숲>의 황시목 검사처럼 감정을 상실하기라도 한 걸까?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에게 요청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운명이 가져오는 슬픔에 참여하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요구되는 보편적인 관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행위는 '의례'(ritual)이며 일종의 ‘놀이’(play)와 같다. “이 말에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놀이였다.”(125) 뫼르소에게 요구되는 슬픔은 실체가 없는 관념이며, 그 관념의 자리를 의례가 메운다. 모든 인간은 ‘의례’에 참여하기를 요구 받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뫼르소는 그 ‘놀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정직한’ 인간이 되려한다. 자신의 감각만이 실체이며 진실이기 때문이다.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보편적인 관념을 믿지 않는 뫼르소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잠시 후 마리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난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고, 아마도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42) 슬픔에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뫼르소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하다. 오직 감각하는 것만이 실체다. 자신의 배 위로 스치는 마리의 머리카락과 자신의 등에 닿는 그녀의 젖가슴만을 감각할 뿐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자신’만을 긍정한다면, 뫼르소는 오직 감각하는 자신만을 믿는다. 뫼르소에게는 먹고, 잠자며, 담배를 피우고, 뜨거운 햇볕을 피하고자 하는 현재의 자신만이 진실한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가장 정직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게 될 것이다.       


이방인의 시간 - 태양 살해범 뫼르소

뫼르소에게는 감각하는 시간, 즉 현재에 가까운 시간만이 의미가 있다. 먼 미래나 과거처럼 길게 늘여진 시간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길게 늘여진 시간은 관습이다. 감각이 아니라 습관의 누적으로 인한 관념의 시간이다. 감각하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태양의 시간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뜨고 지는 태양은 결코 어긋나지 않는 절대적인 관습, 즉 보편이다. 어김없이 솟아올라 뫼르소를 내리쬐는 태양은 무한한 권력을 가진 폭군이다. 그 절대의 시간에게서,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뫼르소는 달아날 수 있을까?     


나는 전등 하나를   있느냐고 물었다. 하얀 벽에 반사되는 불빛 때문에 피곤했다. 그럴  없다고 관리인이 말했다. 시설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전부 켜든지 아니면 하나도 안켜든지.”(15)   


 이상 도저히 견뎌낼  없는 태양의 불길 때문에,  앞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  발짝을 움직인다고 해서 태양으로 벗어날  없다는  알고 있었다.”(67)    


태양은 따로 끌 수 없는 전등과 같다. 뫼르소는 태양 빛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 ‘보편’은 언제나 그를 향해 뜨거운 열기를 내리 쬘 것이다. 피할 수 없으므로 뫼르소는 오히려 태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는 태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뫼르소는 왜 아랍인에게 총을 쏘았냐고 묻는 판사에게 “태양 때문이었다”(111)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는 태양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관습을 향해, 길게 늘여진 시간을 향해, 달아날 수 없는 보편적 관념의 폭압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그를 넘어서려고 했다면, 뫼르소는 태양을 살해함으로써 달아날 수 없는 세계에 맞서고자 한다. 비록 미수에 그칠지라도.     


부조리한 죽음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 받는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부조리한 판결인가? 그는 습관적인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보편으로부터 달아나려 했기 때문에 죽는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형판결을 받는다. 그의 죽음과 판결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그 부당함 때문인지, 뫼르소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고자 욕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도 하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 경찰의 경계선을 뚫고 달아나,  무자비한 기계장치를 모면했던 죄수들의 예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자문했던   번인지 모르겠다. ... 이런 예상을 도무지 뿌리칠  없는 가운데, 우연과 행운이   번은 뭔가 바꿔놓았다는  알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번이면 내게 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중요한 것은 탈출 가능성, 눈물도 피도 없는 의식부터의 일탈, 희망의 모든 가능성들을 열어주는 광적인 질주였다.”(116)    


이제와 살고 싶은 걸까? 그렇지 않다. 저자는 뫼르소의 입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죽음 역시 부조리한 보편적 세계라고 고발한다. 뫼르소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은 정당한가. 애당초 인간의 죽음에 딱 들어맞는 인과 관계란 존재하는가? 원인과 결과와는 무관하게 죽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장치’(116)가 아닌가? 단 한 번의 우연과 행운도 없는 오만한 ‘도르래’가 아닌가? 소설은 태양이라는 보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뫼르소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부조리를 극복할 수 없을지를 묻는다. 요컨대 뫼르소는 일관되다. 그는 부조리한 보편적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들이미는 실존적 인물인 것이다. 뫼르소는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는 이방인이다. 그런 뫼르소를 우리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세계는 어떤 죽음을 그에게 안겨줄까? 그때 우리는 어떤 배심원이 되어 그를 법정에 세울까.     


"이러한 자를 사냥하여  은신처에서 몰아내는 것은 군중은 언제나 정의심이라고 불렀다. 군중은 날카롭기 그지없는 이를 가진 개들을 풀어 끊임없이 이러한 자의 뒤를 쫓도록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179))"



서평5. 이방인/알베르 카뮈/문학동네/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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