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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4. 2019

창조성을 하나님으로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 고든 카우프만

  기독교를 배경으로 자란 내게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틀은 내 인생과 세계를 해명하는데 단단한 토대가 되어주었다. 그것은 완벽한 구조물처럼 보였고, 인간이 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듯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보기 좋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타락’했고 세상은 뒤틀어졌다. 타락하고 뒤틀린 세계를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이와 같은 ‘기독교 세계관’은 여전히 적잖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 구조물을 떠받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결사대 중 하나가 ‘창조과학’이다. 창조과학은 스스로를 창조의 호위병으로 자처한다. 그들은 성서문자주의와 혼연일체를 이루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를 수호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우주의 나이를 수 십 억년으로 보는 과학자들의 연구를 소 닭 보듯 한 채, 성서 연대기를 따라 지구 6천 년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상징을 창조성으로 대체하자’는 고든 카우프만의 주장은 어떻게 들릴까. 고든 카우프만의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는 충분히 사탄 마귀가 쓴 책 취급을 받을 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는 창조에 관한 책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창조에 관한 내용을 다루지만 그것을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데 저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창조에 관한 독특한 견해 하나를 더하려는 것도 아니다. 저자의 기획은 보다 더 근원적이며 원대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창조주의 자리에 ‘창조성’을 놓고자 한다. 창조성(Creativity)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는 창조론이 아니라 신론에 관한 책이다.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내용을 다룬다. 성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혹은 철학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풍요롭고 다채로운 의미를 담아 왔는지를 서술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성서 속 은유(왕, 창조주, 아버지 등)들을 비롯하여, 각 시대마다 철학적(혹은 신학적)으로 발전하고 논의되어 온 하나님 개념을, 카우프만은 능수능란하게 정리한다. 마치 ‘하나님 이름’에 관한 짧은 사상사를 한 권 읽는 듯하다. 이러한 사전작업을 통해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뚜렷하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지는 무수한 은유는 해당 시대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신학 작업은 언제나 구성적인 혹은 재구성적인 작업으로서, 곧 인간이 새로운 우연들과 논점들 및 새로운 문제들을 만날 때 상상력에 의해 응답하는 일이었다.”(54) 고쳐 말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시대와 무관하게 객관적이거나 규정적인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신학은 처음부터 ‘구성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우프만이 하나님이라는 상징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상징은 이미(혹은 여전히) 우리 삶에 강력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포기될 수 없다. 그 상징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주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던 하나님 은유들은 진화와 빅뱅이론 이후 세계의 의미 물음에 적절하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1장에서 저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온 하나님 은유에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과 세계 이해가 인간 중심적 사고, 즉 사랑이나 불안과 같은 인간 실존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별로 거론되지 않은 중요한 가정 하나는 신앙과 신학이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생의 실존적 문제들이라고 부르는 ,  절망, 불안, 죄책감, 죽음, 생의 무의미,  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강조와 이미지들로 인해 기독교의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은 주로 인간적 문제들에 관심을 보이면서 인간중심적인 용어들로 이해되어왔다.”(65)

  카우프만은 신인동형론적 하나님 이해를 비판한다. 신인동형론적 하나님 이해는 결국 인간중심적 신학-신앙으로 이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가 말하는 신인동형론적 창조주 역시 진화와 빅뱅이론이 설명하는 인간 이전의 세계와 긴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부분으로 세계 전체를(우주를 포함한) 이해하려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 신-인간의 관계로만 점철되어왔던 하나님 은유는 세계의 요청에 온전히 답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다.

  카우프만은 대안으로 먼저 ‘생역사적(biohistorical)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를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옳게 보는 것”(73)을 전제로 하는데, 쉽게 말해 인간을 생태-역사적 그물망 안에 있는 ‘부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진화이론이 ‘생태’적 관계에서 발생한 우연적 인간을 말한다면, 저자는 여기에 ‘생역사적 인간’을 덧붙인다. 인간은 생태 발생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언어, 상상력, 창조적 행동들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켜온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카우프만의 견해는 “인간의 활동과 계획과 목적을 상대화하고 때로는 전복시”켜(75) 인간이 그물망 속의 부분적 존재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하면서도, 그물망 안에서 자신과 세계의 역사를 발전시켜 온 창조적 존재임을 주목하게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드러난 ‘창조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장이 문제제기와 그에 관한 대안적 개념 몇 가지 설명하고 있다면, 2장은 1장에서 다룬 개념 중 ‘예기치 않은 창조성’이라는 주제를 심화하여 다룬다. ‘창조성’은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어로, 카우프만은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창조성이라는 은유로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한, 인격적 행위자들은 아주 특별한 종류의 수십 억 년 동안의 생명의 진화가 있은 다음에야 존재하게 되었”(87)기에 인격적 창조주가 근대 이후의 신 이해에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조성이야 말로 다윈 이전의 하나님을 대체할 합리적인(?) 신비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성은 그냥 발생한다(happens). 창조성은 이처럼 신비한 사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좋은 은유가 된다. 제대로 사용되기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절대적 신비라는 사상,  우리가 결코 완전히 꿰뚫어보거나 해체해버릴  없었던 신비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거나 해체해 버릴  없는 신비라는 사상을 보존할  있다.”(90)

  싱겁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카우프만이 하려는 일은 밝힐 수 없는 신비를 해체하거나 우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윈 이후의 하나님 은유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는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를 통해서 “오늘날의 거대한 우주와,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된 성경이 말하는 우주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105) 보다 적합한 하나님 은유로 채우고자 한다. 저자는 그 간격을 ‘창조주’대신 창조성으로 메운다. 인간 이전의 압도적인 세계를 없지 않고 있도록 만든 예기치 않게 찾아온 창조성이야 말로 보다 근원적인 신비이며, 보다 적합한 하나님 은유라고 카우프만은 주장한다.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은 신비가 아니라, 신-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격적인 하나님 신앙이다. 상대적이며 부분적인 것을 전체로 섬기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3장에서는 창조성을 세 가지 양태들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창조성1’은 우주를 생겨나게 한 가장 근원적인 창조성으로 빅뱅이론을 배경으로 한다. ‘창조성2’는 “이미 존재하는 다른 실재들의 맥락 속에서 생긴 창조성으로서, ... 수십억 년의 시간 속에서 인간 및 다른 많은 피조물들을 만든 것으로 간주되는 복잡한 과정들”(118)을 뜻한다. ‘창조성3’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복잡한 세계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적 능력을 말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한다면, 성서가 말하는 신-인간 관계 중심의 하나님 은유는 창조성3의 범주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창조성이 더 큰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창조성의 세 가지 양태를 빅뱅이론, 복잡계 이론, 뇌의 공진화 등의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끈기 있게 설명한다.

  카우프만은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연구들을 부정하지도 않고 또한 신학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오늘날에 적합한 하나님 은유 찾기를 시도한다. 창조성(Creativity)은,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현재까지의 연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삶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 은유를 어떻게 하면 유의미하게 재구성 할 수 있을지를 깊게 고민한 결과물로 보인다. 창조주를 창조성으로 대체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분명히 낯설고 새롭다. 근대 이후 성서문자주의를 탈피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성서해석의 장을 열어 제친 해방·흑인·여성·민중신학 등이 여전히 인간실존의 문제에 집중하는 반면, 창조성은 범위 면에서 그들의 세계인식을 넘어서려는 시도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는 인간 실존에 관한 물음과 대답만으로는 현세계가 처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포함하고 넘어서는 범위의 신학을 자신의 과제로 여기는 듯하다.

  하나님 은유에 관한 모든 신학은 구성적이라는 카우프만의 전제와 오늘까지 이른 신인동형론적 신-인간 이해에 관한 그의 지적은 타당한 듯 보인다. 진화와 빅뱅이론 이후, 하나님 은유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 역시, 정직하게 묻고 답하려는 성실한 학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과 설명에서 묘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가뿐하게 인간 실존을 뛰어넘어 다음 담론으로 향한다. 여성·민중·흑인신학 등이 제기하는 이슈들에 관해, ‘창조성’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고 낙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가볍게 ‘그다음’을 말한다. 자신의 이론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거대한 담론으로 향하는 카우프만의 모습은 영락없는 서구 남성 지식인처럼 보인다. 변두리에 남아있는 자들은 그의 이론에서 쉽게 제외된다. 인간 실존과 관계된 인격신을 넘어서 ‘창조성’을 하나님으로 섬기자는 그의 견해는 이론적으로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현실의 불안을 여전히 끌어안고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가 말하는 ‘창조성’은 세계 중심에 서서 한 개인보다는 거대한 세계를 염려하는 지식인에게서 볼 수 있는 여유에서 흘러나온 결과물처럼 보인다고 하면 그것은 좀 지나칠까.

  나와 같은 이유로든,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성 모독적 견해 때문이든 그의 책을 찢거나 불태울 필요는 없다.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는 하나의 견해이니 말이다.


서평19.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고든 카우프만/한국기독교연구소/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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