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종말은 올까. 어떻게 언제쯤 올까. 어느 종교가 예언하듯 느닷없이 들이닥칠까. 아니면 지진이나 기후변화, 혹은 운석충돌 등과 같은 재앙으로부터 비롯될까. 혹은 핵전쟁과 같은 인간의 유능함과 어리석음이 인류를 소멸시키지는 않을까. 과연 끝은 올까. 끝이란 무엇일까.
십 수 년 전, 앞자리 숫자 ‘일’이 ‘이’로 바뀌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우리는 미지의 날을 두려워했다.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전과 후를 구분했으며,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천년을 불안해하며 기다렸고 어수선하게 맞았다. 어떤 이들은 끝을 준비한다며 생필품을 사재기했고, 다른 누군가는 종말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기 위해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2012>, <아마겟돈>, <딥 임팩트> 등과 같은 영화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종말을 그렸다. 그 후로 십 수 년이 지났지만 끝은 오지 않았다.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1999년은 고사하고 마야 문명이 인류멸망을 예언했다던 2012년은 과거가 된지 오래고, 만화 <2020원더키디>에 해당하는 해(年)는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예측하건대 우리는 2년 후에도 떵떵거리며 땅의 주인 노릇을 할 가능성이 높다. 끝을 논하기에 하늘은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높고 푸르다. 이제 종말은 그 효력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로드』는 종말 이후를 다룬다. 소설은 ‘어떤’ 종말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핵전쟁 때문인지, 아니면 자연에게서 비롯된 재앙인지는 저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말은 이미 왔고 땅은 폐허가 되었다. 소설은 종말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세계를 그린다. 그러므로 문제는 앞으로 오게 될 어떤 날이 아니라 ‘지금’이다. 소설은 묻는다. 종말을 지나온 인간이 ‘지금’도 인간일 수 있을까. 인간을 인간이게 하던 것들을 생존자들은 여전히 지니고 있을까.
『로드』의 저자 코맥 매카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필립 로스 등과 함께 미국 현대 소설의 4대 작가라는 명성을 가진 그는, 염세주의적 생각이 짙은 작가로도 유명하다. 『로드』역시 작가의 비관적 사고를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종말 이후를 다룬다.
소설은 종말 이후에 살아남은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의 생존기를 바탕으로 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이지만, 코맥 매카시는 그 흔한 설정을 가볍게 뛰어넘는 세계와 이야기를 그려낸다. 말(言)을 잃어버린 세계를 드러내는 듯한 작가의 단문과, 색(色)이 사라져버린 나라를 재와 먼지로 뒤덮인 흑백 세상으로 묘사하는 그의 필력은 흔한 설정을 넘어서고도 남는다. 저자는 이미 와버린 종말과, 그것이 선사하는 절망을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화강암으로 빚은 짐승이 삼키는 바람에 내장 속에서 길을 잃은 동화 속 순례자들 같았다.”(7)
남자와 아이는 남쪽으로 향한다. 텅 빈 마트에서 주은 카트 하나에 짐을 실어 담고 다 떨어진 신발을 발에 맨 채, 남자와 아이는 남쪽 바다를 향해 길을 나선다. 하지만 ‘남쪽’이라니, 너무나 막연하지 않은가. 그곳은 어디이며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남쪽 끝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 지금에 머물 수 없어서, 그들을 삼키려는 죽음과 절망에 머물 수 없어서 그들은 길을 나선다. 잿빛 강이 아니라 파란 바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흐릿하고 가느다란 희망으로 그들은 길을 나선다. 하지만 『로드』는 ‘희망’이란 단어를 결코 섣불리 언급하지 않는다. 소설을 장악하는 분위기는 감각될 정도의 절망이다. 희망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만한 땅이 그곳엔 남아있지 않다.
“그런 밤에 잠에서 깨어 마주친 암흑은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암흑은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귀가 아플 암흑이었다.”(20)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 망각으로 빠져든 사물들을 천천히 뒤따르는 그 사물들 이름, 색깔들. 새들의 이름. 먹을 것들.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이름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시대상을, 따라서 그 실체를 빼앗긴 신성한 관용구. 모든 것이 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처럼 스러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깜빡 하고 영원히 꺼져버리는 어떤 것처럼.”(102)
남자와 아이는 서로 이외에는 누구도 필요하지 않으며 아무도 믿지 않는다. 누군가 멀리 보이면 그들은 숨는다. 타자는 오직 위협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은 인간을 ‘훔치고’, 서늘한 지하 창고에 저장한 뒤에 필요한 만큼을 떼어 먹는다. 식량이 부족한 세계에 나와 무관한 인간은 음식이 된다. 인간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다. 인간이 서로를 ‘위하’던 시대는 종말과 함께 끝났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범주를 잃었다. 장난감은 더 이상 놀이기구 일 수 없고 신은 말을 잃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마지막 예(例)를 잃었다.
“초기에는 길에 수의 같은 옷을 걸친 난민들이 우글거렸다. 몰락한 비행사처럼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넝마를 걸친 채 도로 가에 앉아 있었다. 밀고 가는 손수레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뒤에도 수레나 카트를 끌고 있었다. 두개골 속의 눈은 반짝 거렸다. 열(熱)의 나라에 이주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리며 인도를 걷는 신념 없는 껍데기 같은 사람들. 마침내 만물의 덧없음이 드러났다. 오래되고 곤혹스러운 쟁점들이 무와 밤으로 해소되었다.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 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35)
적어도 아이를 보호해야 할 남자에게 종말 이후 ‘타자’란 위협일 뿐이다. 남자는 언제 타인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아이에게, 총알이 한 발 남은 총을 건네며 죽음을 가르친다. 남자에게 희망이 있다면 잿빛 아침에 눈을 뜨지 않고 영원히 잠드는 일 뿐이다. 남자는 절대적인 절망과 불신(不信)의 세계, 모든 것이 의미를 박탈당한 세상을 살고 있다.
“남자는 그 모든 것을 불신했다. 그는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적당한 꿈은 위험에 관한 꿈이며, 나머지는 모두 무기력과 죽음의 유혹이라고 말했다. ... 이 장면을 고정시키라. 이제 어둠과 추위를 내려달라고 해라. 저주를 받아라.”(24)
한편, 코맥 매카시는 아이를 남자와는 다른 존재로 그린다. 아이에게 종말 후는 생(生) 그 자체다. 아이는 더 나았던 세계 즉 종말 이전을 알지 못한다. 색(色)으로 충만했고 다채로운 이야기로 가득했던 세계를 아이는 모른다. 아이는 종말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종말이 잉태했다가 낳은 존재다. 종말에 대한 책임이 아이에게는 없다. 그는 이전 세계의 결과물이 아니다. 아이는 불연속적이며 새로운 존재다. 마치 태초의 인간처럼.
“아무것도 아니야. 우린 괜찮아. 자거라. 우린 괜찮은 거죠, 그죠 아빠? 그래. 우린 괜찮아. 우리한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죠.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96)
그런 아이는 자신이 불을 운반한다고 믿는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을 지녔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불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건 독자에게 달렸다. 다만 아이는 아빠인 남자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품고 있다. 아이는 남자와는 달리 불신으로만 무장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그렇듯 다른 누군가도 불을 지녔을 것이라 믿는다. 타인을 향한 적의(敵意) 혹은 살의(殺意)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남자와 달리 아이는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끝나버린 줄만 알았던 인간의 범주가 아이에게서 새롭게 시작된다. 아이를 통해 저자는 묻거나 희망하는 듯하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아이와 남자는 사투 끝에 남쪽 바다에 도착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만큼의 황폐만이 너울 댈 뿐이다. 바다 역시 잿빛이며 침몰한 배 한 척이 있을 뿐이다. 종말 이후라는 같은 주제를 다룬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처럼 목적했던 세상이 그곳에는 없다. 그대로 끝인 걸까. 앞서 말한 영화가 그렇듯 소설 역시 그대로 끝맺지 않는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도둑맞은 물건을 찾으러 가던 길에 누군가와 싸우게 되고, 그 일로 인해 남자는 죽게 된다. 남자는 아이에게 총을 건네고, 길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면 상대를 쏘거나 아이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라는 말을 남기지만 아이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불을 운반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드』가 종말이 어떻게 오는지를 다루지 않는 까닭은 종말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각자가 이미 종말을 겪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이미 닥쳐온 지금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때로는 살아갈지 말지를 고민한다. 불신은 우리를 사로잡은지 오래며, 우리는 이미 타자의 살을 뜯으며 인육(人肉)하고 있지 않은가. 타자를 ‘위하는’ 일이 당위라고 말하는 자는 누군가. 타자는 이웃이기 이전에 위협이지 않은가. 우리가 바라던 인간의 마지막 범주는 이미 무(無)와 혼돈으로 해소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로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을 말한다. 오래되고 말라버린 사과가 그래도 사과이듯,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 가능성을 종말 속에서 저자는 묻는다.
“남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풀을 헤쳐보았다. 사과였다. 남자는 천 조각으로 사과를 닦은 다음 한 입 깨물어보았다. 바싹 말라 거의 아무런 맛도 없었다. 그래도 사과였다.”(139)
서평18. 로드(THE ROAD)/코맥 매카시/문학동네/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