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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4. 2019

우리를 평범하게 만드는 것

<에브리 맨>, 필립 로스

TV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김신은 불멸의 존재다. 그는 불멸의 삶을 끝내고 무(無)로 돌아가기 위해 도깨비 신부를 기다리는 인물이다. 우여곡절 끝에 신부를 만나게 된 김신은 결국 죽음을 맞아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도깨비>의 은근한 애청자였던 나는 드라마가 그려낸 무(無)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극중에서 무(無)는 해가 떠 있는 하얀 공간이었으며, 종이 쪼가리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세계였고, 김신은 고려 복장을 하고 그 곳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무(無)는 무려 ‘없음’인데 말이다. 물론 그와 같은 묘사가 작가나 연출가의 부족함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누가 ‘없음’을 화면에 담아낼 수 있을까.
 
‘여기 있던 내가 사라진다.’는 게 뭔지를 우리는 알까. 한 줌의 공간이라도 반드시 차지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충만하게 인식하던 내가, 자신이 사라진다는 게 뭘 뜻하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끝, 죽음, 종말 등으로 표현되는 자신(自身)이 없는 세계를 우리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는 세계를 어떻게든 인식하거나, 볼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내가 사라진 세계를, 사라진 내가 경험할 수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착각 말이다. 내 죽음을 슬퍼하는 주변인들을 상상하는 일은 오만한 착각인지도 모른다. 삶 이후에도 자신이 어딘가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그들을 지켜볼 것이라는, 자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 착각.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든 ‘있을’거라고 믿는다. 시간 속에 무한하게 머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사라짐을 상상할 능력이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영혼과 사후세계를 믿고, 전생과 윤회를 바라며, 현대에는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을 인공지능에서 옮겨서라도 ‘있기’를 희망한다. 사라진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에브리 맨』은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이다. 그런 호명은 대체 누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 중 한명으로 명성이 자자한 그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빠지지 않고 거론될 만큼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1933년에 태어나 평생에 걸쳐 30여 권이 넘는 작품과 “나는 끝에 도달했다. 나에게 더 이상 쓸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자신에 차 있으면서도 무력한 말을 남기고 85세의 나이로 올해 숨을 거두었다. 『에브리 맨』은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가까이 온 죽음을 마주하며 쓴 회고록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보통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문장이 지나치게 좋다는 점과, 이야기의 시작을 자신의 몸이 묻힌 묘지에서부터 서술한다는 점이다.

『에브리 맨』은 삶이 아니라 죽음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에브리 맨』은 주인공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그’가 묻힌 묘지에서 시작된다. ‘죽음’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소설의 끝과 시작 그 사이에는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주인공 ‘그’의 시간이 담겨 있다.

『에브리 맨』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로 표현될 뿐이다. 그 이유를 추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간 모두를 뜻할 것이다. 저자 자신의 인생을 바탕에 두고 써내려갔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소설은, 어느새 평범한 인간 모두를 주인공 ‘그’안에 과감하게 집어넣는다. 하지만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무슨 배짱으로 인간 모두를 ‘그’라는 3인칭 안에 욱여넣는가. 더구나 미국의 잘나가는 중산층 백인 남성이. 하지만 배짱을 부리는 것은 저자가 아니다. 저자는 배짱의 주인공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을 뿐이다. 모든 사람을 너나 할 것 없이 평범한 인간 즉 ‘에브리 맨’으로 만드는 것, ‘에브리 맨’ 만큼이나 흔하면서도 압도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 앞에 선 우리를 평범하게 만든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무차별하기 때문에 또한 평범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흥미로울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22)

소설엔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다. 이야기 서두에 나오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인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삶의 몇 순간만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부모와 형제, 직장 동료, 배우자와 자녀 등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관계 속에서 ‘그’가 누렸던 삶의 충만함, 충만했던 삶의 삐걱거림, 충만했던 삶이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담백한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다.  

오랜만에 비로소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내가  삶을 불신해야 할까? 차분하게, 똑바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훨씬  견실한 삶이 남아 있는  같은데,  내가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상상을 할까?”(37)

이제 그들의 몸이 차지하던 공간이  비어버렸다. 평생에 걸쳐 유지되었던 그들의 실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61)

『에브리 맨』은 죽음을 다룬다. 하지만 『에브리 맨』은 셰익스피어처럼 ‘삶인지 죽음인지, 혹은 존재인지 비존재인지(to be or not to be)’ 하는 거대한 물음을 던지거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죽음의 보편성에 항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에브리 맨』은 죽음이라는 막강한 주제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죽음의 막강함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소설은 사라져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다룬다. 소설은 충만했던 삶이 줄어들어 가는 과정을, 삶으로 가득찼던 시간이 멈출 것에 대한 불안을 평범하면서도 담백하게 그려내서 되려 독자들을 섬뜩하게 만든다.   

흙은 관의 나무 뚜껑 위에 떨어지면서 사람의 존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64)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162)

그렇다고 해서 『에브리 맨』이 무차별적인 죽음으로 인한 삶의 덧없음을 기록한 소설은 아니다. 반대로, 죽어가는 삶에도 의미가 있다는 진부한 교훈을 전하는데도 무관심하다. 『에브리 맨』은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드러난 것을 마주하며 겪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그린다. 소설 속 ‘그’는 답이 정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한결같은 보통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특별한 사건이나 만남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인물도 아니다. 소설 끝까지 ‘그’는 오락가락하며 갈등한다. 대학살과도 같은 노년을, 한때는 충만했던 삶이 이제는 텅 비게 된 것을, 피할 수 없어 받아내는 유약하면서도 꿋꿋한 ‘그’를 소설은 말한다. 어쩌면 70세가 넘은 저자 필립 로스 또한, 뚜렷한 답 없이 사라져가는 삶에 관한 물음을 끈질기게 써 내려간 것은 아닐까. 『에브리 맨』은 지독히도 평범한 죽음을 별 수 없어 받아내는 ‘그’를 담담하면서도 처연하게 그려낸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83)

죽음은 거창하지만 평범하다. 있던 나를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거창하고 모두에게 한결 같기 때문에 평범하다. 죽음은 모든 인간을 평범하게 만든다. 그것은 나쁜가? 거대한 죽음 앞에 평범한 하루는 하찮은가? 소설 중반쯤에 등장하는, 저자의 작품론으로 추측되는 한 문장은, 모든 '그'에게 던지는 저자의 한 마디처럼 보인다. 죽음이라는 막강한 주제 말고 여전히 손에 쥐기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평범한 삶이 있다고 말이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86)



서평17. 에브리맨/필립 로스/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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