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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an 07. 2020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사양>, 다자이 오사무

3주에 한 번 찾아오는 ‘고전문학읽기’(모임 이름: 우리는 틀렸다. 우리는 좆도 모른다.) 모임을 마치고 나면 우리는 습관처럼 가까운 대형서점으로 향한다. 다음 모임에서 읽을 책을 고르려는 까닭이지만 쉽게 결정한 적은 별로 없다. ‘3주에 한 권’이라는 한정 때문인지 우리는 (주로 나는) 수많은 책들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이것도 읽고 싶고 저것도 읽고 싶으니까. ‘어차피 다 읽을 거 아무거나 읽자’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나는 안다. 책 목록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걸.

고르고 골라 네-다섯 권의 책을 후보에 올린 뒤 투표를 진행한다. 모임 참여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책 두 권에 익명으로 표를 던질 수 있다. 눈치 게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투표 현황을 볼 수 있으니까. 실제로 마지막 사람이 던지는 표에 따라 읽을 책 제목이 달라지기도 한다. 누가 민주주의를 훌륭한 제도라고 했을까. 때로는 가장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선정되지만 결정적인 건 늘 두께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은 얇다.

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책모임을 끝내고 서점으로 가는 걸음이 은근히 설렌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수백 수천 권의 책 앞에 서서 ‘이 책은 좀 어렵다. 저 책은 좀 통속적이다.’라며 나대는 게 즐겁다는 얘길 하려던 거였다. 깔끔한 검은색 표지를 쓰는 출판사의 클래식과 하얀색 표지를 고수하는 출판사의 클래식 사이를 오가며 번역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것 자체가 재밌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어느 책을 다음 읽기 후보에 넣고 뺄지를 고민하는 게 어렵지만, 그 어려움이 참 좋다는 얘기를 하려던 거였다. 독자들이 고르기 쉽게 가판대에 깔아놓은 유명 고전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게 슬쩍 뿌듯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사양』은 늘 가판대에 있던 책 중 하나였고, 『인간실격』 이후 모임에서 두 번째로 읽는 다자이 오사무의 책이었다.

『사양』을 선택한 까닭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간실격』에서 확인한 다자이 오사무의 서늘하면서도 독특한 문장을 다시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책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를 들었기 때문인데, 저자가 여성 주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내용이었다. 남성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여성 주체를 1인칭 화자로 쓴 것이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사양』을 ‘페미니즘적’ 소설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소문은 내게는 다소 의아했는데, 다자이 오사무 역시도 일본 근대 문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 혐오’의 혐의를 짙게 받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슨 이유로 여성을 1인칭 화자로 삼았을까. 『사양』은 과연 여성주의적 가능성을 담아내고 있을까? 다자이 오사무는 기대했던 만큼의 문장을 또 다시 보여줄까?

『사양』(斜陽)은 귀족이었던 한 가족의 몰락을 그린다. 주인공 가즈코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전쟁에 참전한 남동생은 일본의 패전이 확정된 이후에도 소식이 없다.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 가즈코는 어머니와 둘이서 집을 돌보지만, 경제력이 없는 두 사람은 이제 집을 팔고 떠나야 한다. 귀족으로서 살았던 너른 집을 팔아 떠나면서 그들은 평민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더 이상 귀족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노쇠한 과부이며 이혼녀일 뿐이다. 손짓 하나에도 품격을 실어 나르며 온 몸으로 자신이 귀족임을 증명하던 어머니는 죽어가고 있다. 그녀는 마지막 귀족이다. 그녀 이후로 더 이상 귀족은 없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작품 속에서 어머니를 귀족 세계의 끝자락에 세운 뒤 ‘이제 끝!’이라고 말한다. 더는 없다. 남은 것은 몰락 밖에 없다.

훗날 남동생 나오지가 돌아오지만 그에겐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는 철저하게 몰락하고 퇴폐한 인간을 드러낼 뿐이다. 나오지는 선과 악, 학문, 이데올로기 등의 껍데기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인간과 자신을 끝없이 혐오한다. 소설 속 나오지의 글과 말에는 이상(理想)으로 향하지 못하고 허영으로 추락해버린 세계와 인간에 대한 혐오가 진하게 배어있다. 그는 뫼르소 같은 인간, 있는 그대로의 실존을 흠모하지만 그런 이는 없다. 적어도 자신은 그런 이가 아니다.     

학문이란 허영의  다른 이름. 인간이 인간답지 않으려는 노력이다.”(63)

데카당?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 그런 말로 나를 비난하려는 사람보다는 “죽어 버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고맙다. 산뜻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죽어 버려!”라고 말하지 않는다. 쩨쩨하고 용의주도한 위선자들이여! 정의? 소위 계급투쟁의 본질은 그런 데에 있지 않다. 인도주의? 웃기지 .  알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를 쓰러뜨리는 거지. 죽이는 거야. “죽어 버려!”라는 선고가 아니라면 뭐냐. 얼버무리지 . 그러나 우리 계급에도 제대로  녀석이 없어. 백치, 유령, 수전노, 미친개, 허풍쟁이, 으스대는 , 구름 위에서 오줌. “죽어 버려!”라는 말조차 아깝다.”(65)

다자이 오사무 자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한 듯 보이는 인물 나오지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술과 마약에 찌들어 지내다가, 몰락한 세계와 허세로 찌든 인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다(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세 번에 자살시도 끝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에 간행된 『사양』은 전쟁에서 패배한 후 실의에 빠진 일본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있다는 인상을 준다. 태양은 졌고, 세계는 끝났고, 삶은 가치가 없다. 저자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독자는 소설 속 몰락한 귀족을 당시 패전국인 일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실제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사양족’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유행했을 정도라고 하니, 사양이 일본을 뜻한다고 생각한들 그건 독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물론 ‘귀족 = 일본’ 같은 도식으로 소설을 이해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사양』(斜陽)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퇴락의 이미지는, 패전이 당시 일본 사회에 가져왔을 어두운 분위기와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소설의 주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몰락과 끝이다.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가 관심하는 대상은 국가나 사회가 아니라 인간이다. 다만 그에게서 풍겨 나는 음울함이나 자기혐오를 패전과 떼어놓고 사고하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양』은 몰락만을 말할까.  


어머니가 순수하고 이상적인 인간의 끝 혹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면, 남동생 나오지는 현실에서 탈락해버린 자기혐오적 인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 화자인 가즈코는 어떨까.

가즈코는 몰락한 계급과 이혼한 여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갈등한다. 때로는 평민으로 몰락한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며, 경제적 지원을 조건으로 젊은 자신을 아내로 들이고 싶다는 한 노인의 제안 때문에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 이후를 향하면서 가즈코는 변한다. 그녀만이 변화로 향한다. 그녀는 ‘몰락’이라는 주제와 상황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즈코는 혁명을 꿈꾸고 금기를 넘어서고자 한다. 가즈코는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여성 경제학자이자 혁명가의 책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책의 내용은 경제학에 관한 것이지만, 경제학으로만 읽는다면 참으로 시시하다. 너무나 단순하고 뻔한 사실뿐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경제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겐 너무 따분하다. 인간이란 원래 쩨쩨하며 영원히 쩨쩨하다는 전제가 없으면 도무지 성립되지 않는 학문으로, 쩨쩨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배의 문제건 뭐건 아예 흥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책을 읽고 다른 면에서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것은  책의 저자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낡은 사상을 모조리 파괴해 나가는 저돌적인 용기이다. 아무리 도덕을 거스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내달리는 유부녀의 모습마저 떠올리게 된다. 파괴 사상. 파괴는 슬프고 애처롭고 아름답다. 파괴하고 다시 짓고 완성하려는 , 일단 파괴하면 완성할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파괴해야만 한다. 혁명을 일으켜야만 한다. 로자는 마르크스시즘에 일편단심 슬픈 사랑을 했다.”(107)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 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길이 있는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109)

가즈코는 혁명을 일으킨다. 그녀에게 혁명은 사랑과 같다. 가즈코는 사랑을 ‘선택’한다. 당황스러운 건 그 대상인데 그는 우에하라라는 유부남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우에하라에게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오늘날 독자들을 한 번 더 당황시킨다. 고작 유부남을 사랑하는 일과 그의 아이를 갖는 것이 어떻게 ‘새로운 길’ 일 수 있는가.  

(적어도 소설 속에서) 가즈코의 사랑이 혁명인 이유는 그것이 금기를 부수고 뛰어넘으려는 그녀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몰락을 극복하려고 어머니 같은 귀족으로 회귀하려고 애쓰거나, 혹은 남동생처럼 몰락에 자신을 수몰시키지 않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책 말미에 가즈코는 ‘낡은 사상’, ‘낡은 도덕’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더 이상 관습이나 윤리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우에하라가 어떤 인물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가즈코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뱀으로(48), 낡은 사상인 동시에 자신을 억압하는 선악을 붕괴시키는 악마적 존재이자 새로운 세계를 잡아당기려고 금기를 넘어서는 희망이다. 『사양』은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30)고 말하던 가즈코가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고 말하게 된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가즈코의 출산으로 끝을 맺는다. 흥미롭게도 가즈코는 자신과 아이의 관계를, 성서 속 마리아와 그의 아들에 비유한다. 아이를 사생아로, 아버지와 무관한 존재로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몰락해 버린 낡은 과거와 연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혁명에서 비롯한 새로운 태양을 다자이 오사무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 주변에서 낡은 도덕은 여전히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은 ,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다 표면의 파도가 아무리 요동친들  밑바닥의 바닷물은 혁명은커녕 꿈쩍도 않고 자는  드러누워 있을 뿐인걸요. 사생아와  어머니.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워,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아무쪼록 당신도 당신의 투쟁을 계속해 주세요.”(163)
 
끝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무엇 때문에 여성을 『사양』의 주체로 삼았을까. 그는 세계를 뒤덮었던 전쟁을, ‘인간’임을 자처한 남성들의 것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 가즈코는 그것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전쟁 중에 즐거웠던 기억은 오직 이것 하나뿐. 생각하면, 전쟁 따윈 시시했다.
작년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도 아무  없었다.
 전해에도 아무  없었다.”(39)

전쟁은 사랑도 혁명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에 대해 느낀 혐오는 사실상 인간임을 자처하는 남성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인간’에게서 다자이 오사무는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남성 주체로는 도무지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고 믿었던 걸까.     

보기에 따라서 『사양』은 여성주의적 논의가 충분히 가능한 소설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다. 혁명 즉 사랑의 대상을 유부남으로 설정한 것이나,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이상적으로 다룬 부분에서도 남성인 저자와 시대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지만, 그것보다도 그가 여성을 주체로 설정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인간에서 탈락한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인간실격』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다양한 여성과 특유의 유대감을 보인다. ‘인간’에서 탈락한 자신을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여성과 동일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시도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사양』의 주체는 과연 어떨까.  

아쉽게도 『사양』에서는 『인간실격』에서 접했던 특유의 스산한 문장을 자주 만나기가 어려웠다. 자기 글을 쓰려고 하기보다는 여성을 ‘흉내’내서 말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그 증거로 남동생 나오지의 글과 말을 통해서는, 작가만의 독특한 문장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으니까. 『설국』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양』이 여성을 가장 탁월하게 드러낸 역작이라고 극찬하지만, 대체 자기들이 뭔데 ‘탁월한 여성’을 운운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서평29. 사양(斜陽)/다자이 오사무/민음사/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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