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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an 14. 2020

사이로 지나가시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멀리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오늘 본문은 나병에 걸린 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한때 나병이라고도 했고, 문둥병이라고도 했지만, 오늘은 한센 병이라는 말을 쓰겠습니다. 나병이나 문둥병이라는 말에는 그 질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혐오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렸던 열 명 모두는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습니다. 하지만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명 뿐이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었죠. 왜 한 사람만, 그 중에서도 하필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왔을까요. 본문은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은 아홉을 책망하는 걸까요? 질문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왜 돌아왔을까요.

대부분 이 본문을 ‘감사’에 관한 이야기로 읽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사람, 단물 다 빨아먹고 입 싹 닦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구원해주신 은혜를 잊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메시지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감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권장됩니다. 감사가 예배로 연결되는 경우는 그나마 낫지만, 헌금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본문은 과연 ‘감사’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본문 첫 구절은 예수님이 여정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거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중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죽음을 향해 걷는 걸음입니다. 큰 그림은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예수의 길이고, 그게 뭘 뜻하는지를 각각의 사건들이 보여준다고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 지나시는 길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입니다.  

첫 구절부터 눈을 사로잡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신다.’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관심 있게 들으셨다면, 11절만으로도 어떤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록자는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라는 경계에 예수님을 서게 함으로써, 어떤 도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조금만 덧붙이자면, 갈릴리는 유다에 속한 지역이고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 멸시 받는 땅입니다. 역사적인 이유로 유다는 사마리아를 벌레 보듯 대했고, 사마리아 역시 그런 유다를 좋아할 리 없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다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을 겁니다. 유다는 성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즉, 유다는 하나님을 가졌지만 사마리아는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처럼,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아무리 멀더라도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땅이었고,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멸시와 혐오는 당연한 결과였고, 그로인한 사마리아의 모멸감과 분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데 누가는 자꾸 사마리아를 언급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서게 합니다. 긴장감이 가득한 경계에 예수의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가 충돌하는 그 곳이, 충돌하면서도 결코 건너가고 건너올 수는 없는 그 사이경계가 예수님의 자리라는 듯이 말입니다. 혐오와 멸시로 자신을 가득 채웠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가졌다고 자신하는 한쪽과, 분노와 미움,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는 무력감과 수치심등에 사로잡힌 한쪽, 그 사이에 서는 겁니다. 건너갈 수 없고, 건너올 수 없는 큰 구렁텅이 사이에 예수는 서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설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선 밖으로 나가면 버림받는다고 말하거나, 여기 있어야 안전하다고 겁박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성경은 말하니까요. 미안하지만 우리를 가두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죄송스럽지만,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안락함일 뿐만 아니라, 그 바깥을 향한 폭력과 무시, 무지와 배제입니다.

대형교회만을 중심으로 한 교회 정책은 자신들 아닌 작은 교회를 전혀 알지 못하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국가 정책은 노동자의 삶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상’만을 끝없이 밀고 나가면 그 안에 들지 못한 ‘비정상’들은 분노 혹은 무력감 속에서 하나 둘 쓰러져 갑니다. 교회는, 자신의 경계를 할 수 있는 만큼 끝까지 밀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경계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사건 속에서 드러내는 예수의 질문에 우리는 정직하게 답하고, 자유롭게 대응해야 합니다. 건너갈 수 없고, 건너올 수 없는 금지 구역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 보는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만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겁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서 예수님은 한센인 열 사람을 만납니다. 한센인으로 번역한 단어는 사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을 포함합니다만, 당시에는 그것을 오늘날 생각하는 피부병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피부가 이상해진다는 건 그야말로 저주였죠.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하고, 전염성이 있는 한센병은 부정함을 대표하는 피부병이었을 겁니다. 부정한 사람은 공동체 내에 머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에도 속할 수 없던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도 또 저기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동체나 사회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인거죠. 경계위에 걸쳐있는 유령 같은 존재인겁니다. 누가 거기에 해당될까요.

일과 이라는 숫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해, 아무런 혜택도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그 노동을 이용하죠. 난민 역시 경계선 위에 삽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체 삽니다. 방금 저는 세 가지 삶을 짧게 말했는데요.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혐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사이’를 살아가는 삶은 여전히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간다고, 그 사이를 지나신다고 말합니다.




12절과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2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13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율법서에 따르면 부정하다는 판결을 받고 공동체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행인이 보이면 크게 소리를 질러 위험을 알려야 했습니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라고요. 하지만 열 명의 한센인들은 ‘나는 부정하다’고 외치는 대신 전혀 다른 길을 택합니다. 그들은 멀찍이서 소리를 높입니다.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마치 건너갈 수 없는 큰 구렁텅이를 사이에 두고 나사로를 제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부자같이 말입니다.

그들이 잘못한 걸까요. 율법을 어겼으니 그들을 벌해야 할까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불편해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딘가에 민원을 넣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괜한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말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요.

그들은 불쌍한 자로 머물지 않고 소리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겁니다. 자신들이 거기 있다는 걸 예수님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겁니다. 소리치는 거 말고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굴뚝에, 첨탑에, 크레인에 올라서라도 소리쳤을 겁니다. 그들은 ‘나는 부정하다’고 외치기는커녕 도와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법을 넘어 소리쳤습니다. 자신이 없지 않고 있다고 외칩니다. 이들을 비난 하시겠습니까.

법을 넘어 소리치는 그들을, 저 아득한 건너편에서 자신이 없지 않고 있다고 소리치는 그들을 예수님은 돕습니다. 나무를 옮겨 바다에 심습니다. 큰 구렁텅이에 발을 내딛습니다. 예수님은 사이로 걸었고,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을 낫게 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일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끝났을 텐데 이번 본문에는 뒷얘기가 더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그들의 몸을 보여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는 여러 이유로 공동체 바깥에 살던 부정한 사람이,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때 하는 행동입니다. 제사장은 깨끗해진 몸을 확인하고, 공동체에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나은 몸을 확인하고,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 사람만 돌아왔을까요. 아니 그는 왜 돌아왔을까요.  

세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그 사람만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필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는 예수님을 씁쓸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겁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낫는 순간 다시 분리가 일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센병 때문에 열 명이 함께 동고동락하며 연대했던 순간이 깨져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기능,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기능이 다시 작동하자, 그들이 함께 누렸던 연대를 부셔버린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참 속 쓰린 이야기입니다. 열이 하나와 아홉으로 다시 나뉘는 순간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수께 돌아온 유일한 ‘한 마리 양’인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세 번째는 두 번째와 비슷한데요.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예수님이 말했을 때, 성전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그는 나았음에도 자기 몸을 보여줄 제사장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 일을 맡은 사람이니까요. 돌아갈 성전이 없는 그는 예수님에게 갑니다. 본문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즉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는 의미심장합니다. 갈 곳이 없어 유일하게 돌아온 사마리아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예배라고 본문은 말하니까요. 이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흥미롭게도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찾아 헤매던 여인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야기가 하나님이 온 힘을 다해 찾는 이야기라면, 오늘 본문은 찾아진 한 드라크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끝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에게 구원을 선언합니다. 그가 얻은 구원은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고 사이로 지나가신 예수님 사이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신 예수께 있습니다. 법을 넘어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부짖는 목소리와 예수를 따라 걷는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갈릴리뿐만 아니라 사마리아도 예수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서 만난 한센병 출신의 한 사마리아인과만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저는 광화문 태극기 집회는 물론이고, 서초동 촛불 역시 예수를 선점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예수는 사이를 지나다니며 어느 경계 안에도 들지 못한 사람과 함께 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신학교와 목회자들에게 낙인찍혀 ‘더 이상 어떻게 신학을 할 수 있겠느냐’며 울분과 무력감을 토한 신한생과, 무관심 속에서도 강남역 한복판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첨탑에서 올라가 계신 김용희님과, 1과 2라는 숫자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이들과, 어느 나라에도 들지 못해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과,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해 아무런 혜택도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하는 성노동 여성들과, 갈릴리와 사마리아 어디에도 들지 못한 경계 밖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는 구원에 관한 권리주장을 할 수 없으며, 예수를 따라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를 지날 수 있을 뿐입니다.



2019년 10월 13일 [함께.걷는.교회.]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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