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된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들어가며
오랜 시간 출석한 교회에서 ‘제자훈련’이라는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해당 교회에 대한 내 시선이 편견에 사로잡힌 탓에 기억이 뒤틀렸을 수 있지만, 그것은 ‘제자훈련’이라기보다는 지도자 양성과정이었다. 제자, 즉 배우는 자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를 기르는 과정이었다. 의문이 생긴다. 가르침을 위한 배움이 배움일 수 있을까. 늘 ‘제자도’를 설파하는 교회는 자신을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중 어느 쪽에 세우고 싶어 할까. 애당초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제자란 뭘까.
『제자가 된다는 것』(Being Disciple)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이은 후속 편이다. 아직 읽지 못한 『인간이 된다는 것』까지, 로완 윌리엄스의 그리스도교 입문 3부작 중 두 번째가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세례, 말씀, 성찬, 기도 이렇게 네 가지 주제를 통해, 간결하면서도 심도 깊은 언어로 ‘그리스도인 됨’을 다시 숙고하게 해 준 저자가 ‘제자 됨’은 어떻게 풀어갈까. 앞선 책을 통해서 적잖은 신선함을 던져준 로완 윌리엄스는 이번엔 우리들을 어디로 데려갈까.
1장. 제자가 된다는 것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제목과 같은 1장 <제자가 된다는 것>은 책의 서론 격으로, ‘제자 됨’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로완 윌리엄스에게 제자 됨은 거창한 따름이 아니다. 그것은 ‘상태’다
“제자도란 삶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도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며, 우리가 내리는 결단이나 믿는 내용뿐 아니라 삶의 상태까지 다룹니다.”(25)
저자는 ‘나를 따르라’는 엄중한 명령으로 대표되는 ‘거창한 헌신’, ‘무거운 결단’등을 제자도로 제시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로완 윌리엄스는 ‘따름의 제자도’가 아니라 ‘함께 머묾’을 제자도로 제시한다. 함께 머묾, 그것은 곧 삶의 상태다. 그가 말하는 ‘삶의 상태’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결단이나 헌신이 아니라 ‘비간헐적’ 특성, 즉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평범한 삶’과 밀접하다. 이것이 『제자가 된다는 것』을 잘 읽기 위한 핵심이다.
비간헐적 특성을 띤 제자도를 위해 저자는 ‘인식’을 제시한다. 참된 앎을 뜻하는 인식은, 곧 깊이 보는 일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이웃과 사물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즉 관상(觀想)을 통해서 우리는 인식하며, 그것을 통해 제자도와 우리 삶을 일치시킨다.
“여기서 관상과 행동 사이에는 전혀 대립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끔찍하고 진부한 사고 가운데 하나가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물음, 곧 관상이냐 행동이냐를 묻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관한 대답은 명백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행동 없는 관상’이나 ‘관상 없는 행동’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에 실로 열매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삶을 파괴할 만한 선언문을 작성하는 셈이라는 점입니다. 관상과 행동을 묶어야 합니다.”(45)
2장. 믿음·소망·사랑
저자는 자칫 진부할지도 모를, 세 단어 믿음 소망 사랑을,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을 소환하여 제자도와 묶는다. 성 요한은 인간의 정신을 ‘이해’와 ‘기억’과 ‘원함’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는데, 저자는 앞에서 제시한 정신의 세 가지 측면을 믿음, 소망, 사랑과 묶어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그 길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생각한 것이 혼란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또 우리가 원했던 일들이 공허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지성과 기억과 의지가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소망·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이 다시 지음 받아야 합니다.”(50)
첫 번째로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지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상호 설득과 진지한 토론에 의해 우리의 정신을 넓혀서 더욱 풍성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54) 그런데 이렇듯 날카롭게 지성의 상실 문제를 지적하던 저자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변하거나 떠나가지 않는 존재 곧 ‘타자’에 대해 확신하기를 배웁니다.”라고 주장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지성의 상실에 대한 대책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성과 믿음을 연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까? 내게는 저자의 해결책이 다소 느닷없다.
두 번째로 저자는 “기억 앞에 놓인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는가?’입니다.”(58)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소망을 정체성과 관련짓는다. 정체성 상실은 과거(전통과 같은)와의 단절, 연속성의 폐기에서 기인한다. 저자는 소망을 기억(과거)과 묶는 까닭은, 연속성 안에서 발견되는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근거는 다시 하나님이다. (나는 이런 서술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적절한 문제제기에 비해 해결책은 다소 허탈하다.)
“소망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고, 그 결과 하늘에 계신 증인 곧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기억의 혼란 – 우리는 누구였고 나는 누구였나? 지금 우리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 이 견딜 만하게 된다는 확신입니다.”(61)
세 번째로 저자는 사랑과 ‘원하는 것’(의지)을 자유와 묶는다. 세계가 진열장 위에 전시해 놓은 소비품들을 원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의지도 자유도 아니다. 그것은 피상적일 뿐이다. 자유는 자신을 열어 실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이며, 그것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상을 통해 세상과 인류 전체, 구체적인 한 인간, 하나님을 존중하는 일입니다.”(65)
3장. 용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 가운데 하나는 믿음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이 우리가 처한 곤경을,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들어 준다는 사실을 아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나누는 양식에는 물적 자원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들어 준다는 사실을 아는 일입니다.”(71)
3장 <용서>는 가장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우며, 받아들이기 어려우면서도 독자들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용서하라’고 말한다. 용서를 당위로 주장하는 진술은 언제나 불편하다. ‘용서하라’는 교훈, 혹은 ‘용서’라는 말 자체가 독이 되어버린 세계를 우리가 사는 탓이다. 하지만 <용서> 장은 곳곳에서 나를 붙잡아 세운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챕터다.
저자는 주기도문 속 ‘용서’를 바로 앞에 자리한 ‘일용할 양식’과 연결한다. 먹는 일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낸다. 우리에게는 양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도다. 용서는 일용할 양식이다. 빵이 우리 몸에 스며들 듯, 우리는 타인에게 결핍한 채로 받아들여진다. 이것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으며, 받아들임 없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할 수는 없다.
“용서는 서로 간에 생명의 양식과 진리의 양식을 주고받는 일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인간성에 해를 끼치고 그 존엄성을 부정했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 양식을 먹여 주고 상대방의 존엄성을 키워 주는 관계로 회복되게 해주는 길입니다.”(76)
동시에 용서는 권력을 갖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기력에 참여하는 행위”(77)이다. 용서받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용서의 말없이 나는 살 수 없으며 또 내가 해친 사람의 치유 없이 나 자신이 되는 사명도 완수할 수 없”(77)기 때문이다.
4-5장. 거룩함과 사회 속의 신앙 성령 안의 삶
4장 <거룩함>은 구약에서 ‘구별’이나 분리로 여겨지던 거룩함이 어떻게 제자도와 관련하는지를 서술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자신처럼 제자들도 거룩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에게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참여하는 일을 뜻한다.”(87)
5장 <사회 속의 신앙>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 참여에 관해 말한다. 그것에 대해 로완 윌리엄스는 참여해야 한다거나,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찬반양론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제자는 자신의 존재방식, 즉 상태로 사회에 참여한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주제를 ‘삶의 상태’ 안에서 어우러지게 할 때 제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이질적인 존재로 사회에 참여한다.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교(혹은 종교)의 자리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국가를 교회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인간성을 최고로 구현하는 공동체 삶 –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는 삶 – 의 형식과 방향을 국가와 전체 문화에게 제시합니다.”(115)
6장. 성령 안의 삶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영성’이라는 말을 ‘자기이해’와 연결하면서 책을 매듭짓는다. 저자는 무정념(dispassion), 평정, 침묵, 기도와 성장 등에 관한 전통과 자신의 의견을 차분하게 펼쳐나간다. 기도와 성장에 관해 인상 깊었던 내용을 인용한다.
“기도에서 마주치는 진짜 문제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재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십중팔구) 우리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130)
“우리가 속으로 ‘음, 나는 영적 성장을 이루었어. 내게 딱 어울리는 수준에 도달했어. 내 마음에 드는 제자도의 스타일을 찾아냈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서글픈 형편에 있는 것입니다.”
로완 윌리엄스에게 성장이란, 뚜렷한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미는’(빌3:33) 것이다.
나가며.
얼핏 보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평이하다. 독자 입장에서 본서는, 전작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비해 참신함도 덜하고 가끔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진부한 서술도 적잖다. 추측컨대 하나님이라는 기반을 잃을 때 그리스도교가, 혹은 세계가 이웃이나 관계, 혹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동력 자체를 잃을 거라는 확신 탓인지, 저자는 모든 장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한다.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이나,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사상이, 맹목적이면서 폭력적인 일부 그리스도교만큼이나 우리 삶을 메마르게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알겠다. 하지만 내게 그에 관한 서술의 빈도나 강도가 과해 보이는 까닭은, 균형 혹은 근거를 잃지 않으려는 강박 탓에 오히려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흐릿해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점은 분명히 아쉽다.
그럼에도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한다. 전작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는 선을 분명하게 긋는 방식으로, 저자는 '제자'인 그리스도인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인 됨을 네 가지 형식으로 설명하는 반면, 제자 됨을 '삶의 상태'라는 특징으로 서술하는데, 모든 장에서 일관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각 장에는 독특한 시점이나 방법론들이 있어, 그것들을 찾아내고 배우는 묘미도 여전하다.
문장에서 배어 나오는 따뜻함이나 배려심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평범한 듯 보이는 문장에는 신학적인 층위가 여러 겹으로 놓여 있어, 슬쩍 지나치면 놓치기 쉬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천천히 읽기가 필요한 책이다. 시리즈 마지막 책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떨까?
서평32. 『제자가 된다는 것』/로완 윌리엄스/2018/복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