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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Apr 15. 2020

'롤리타'에 대한 오해?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 롤리타와 콤플렉스
프랑켄슈타인이 몬스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라는  사람들은 알까. 『프랑켄슈타인』을  메리 셸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괴생명체를 만든 창조자의 이름이 훗날 그의 피조물과 결합하게 되리라고 예상했을까.   없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까. 글쎄. 이제 작가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하나의 기호(記號)이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말과 흉측한 얼굴을  이미지는  몸처럼 작동한  오래다.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이상한 문장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경우는 다르지만 ‘롤리타역시 창조자와는 무관해진 이름  하나다. 지금은 소아성애증을 가리키는 정신의학 용어인 ‘롤리타 콤플렉스, 사실  역할을 떠맡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용어의 모태인 소설 『롤리타』가 1955년에서야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롤리타』는 어쩌다가 ‘콤플렉스라는 말과 만나게 되었을까. 흔히 넘겨짚듯 『롤리타』는 어린 소녀에 대한 사랑을 변호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제목만으로도 주변을 살피게 만드는 소설  『롤리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얼마나 외설적일까. 오죽했으면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악명을 얻었을까. 기대와 불안이 묘하게 뒤섞인 채로 책장을 넘긴다.  장을 넘기니 『롤리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부제? 분명히 표지에는 『롤리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다시 겉표지를 확인해보니 역시 그렇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니다. 그냥 지나쳐서는  된다. ‘고백 붙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고백일까. 작가 나보코프? 고백을 있는 그대로 믿어도 될까. 엉뚱하게도 그게 『롤리타』를 읽는데 중요한 관건이다.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문학일까.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일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899~1977)


2.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의 여행
소설은 수기 형식을 띤다. 수기를 쓰는 이는 감옥에 수감 중인  남성이다. 험버트 험버트가 그다. 험버트 험버트는 누군가를 살해했다. 누굴 죽였을까. 롤리타? 험버트 험버트는 교도관의 감시하에서 살해 경위를 기록하는 중이다. 소설은 자연스레 험버트 험버트가  고백록의 형태를 띤다. 그의 고백을 따라가 보자. 믿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의 의붓딸이다. 심드렁하게  하숙집을 둘러보던 험버트 험버트는 집주인의  롤리타를 보고 매혹당한다. 롤리타가 ‘님펫’(9~14 소녀  마법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소녀에게 험버트 험버트가 붙인 별칭. 님프를 바꾼 말이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전히 롤리타 때문에 그곳을 선택한다. 그뿐 아니다. 험버트 험버트는 자신에게 반한 롤리타의 엄마 헤이즈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동거를 결정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롤리타를 손에 넣기 위해서다.

 , 그들의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헤이즈는 롤리타를 ‘Q 캠프 보낸다.  사람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헤이즈는 어느  험버트 험버트가  글을 읽게 된다. 롤리타를 대상으로  에로틱한 글이다. 충격을 받아  밖으로 뛰쳐나가던 헤이즈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는다. 뜻밖에 기회를 얻은 험버트 험버트는 캠프에 참여 중인 롤리타를 납치하듯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롤리타』 1부는  사람의, 아니 험버트 험버트가 꿈꾸었던 여행의 시작까지를 다룬다. 몽환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나는 이른바 ‘섹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게 동물적인 행위는 누구나 상상할  있다.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은 더욱더 원대한 계획이다. 나는 님펫들의 위험천만한 마력을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215)

과거를 떠올리며 글을 쓰던 험버트 험버트는 반복해서 자신을 변호한다. 자신은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아니다. 롤리타를 강간하거나 어린 육체를 유린하려고   아니다. 단지 롤리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성을 붙잡아두고 싶었을 뿐이라고. 실제로 『롤리타』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 연관해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인 장면이 없다. 그저 사실인지 동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장면과 마법 같은 문장으로 가득할 뿐이다. 그렇다면 험버트 험버트는 정말 아무런 죄가 없을까?

2부에서  사람은  번째 여행을 떠난다. 롤리타의 제안 때문이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어느덧  사람의 입장은 뒤바뀌어 있다. 님펫 사냥꾼 험버트 험버트는 마법에 걸렸다. 그는 롤리타를 소유하고자 했지만 도리어 ()에게 포획된다. “나는 나약했고, 현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여학생 님펫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인간적인 요소는 줄어들었지만 열정과 애정과 고뇌는 점점 늘어만 갔고, 그녀는 바로  점을 이용했다.”(292)

여행 내내 험버트 험버트는 뒤쫓는 시선을 느낀다. 누굴까. 불안에 사로잡힌 험버트 험버트를 롤리타는 비웃는다. 죄책감 탓에 허황한 망상에 빠진  아닐까. 하지만 결국 롤리타는 사라진다. 달아난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험버트 험버트는 훗날 그를 찾아내서 결국 죽인다. 그런데 험버트 험버트가 쏴 죽인 이는 누굴까.

3. 마법에 걸린 사냥꾼 – 험버트 험버트
옳고 그름을 떠나,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했을까. 고백록을 읽은 배심원들은 그의 손을 들어줄  있을까. 롤리타를 향한, 혹은 롤리타의 마력을 붙잡아두려는 그의 열정은 순수한 것이었을까.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의 보호자인 동시에 연인으로 인정받을  있을까. 혹자들의 주장처럼,  소설, 아니  고백록을 사랑에 관한 회고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할까.

아니. 그렇지 않다. 험버트 험버트 역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의 고백록은 죄의식으로 가득하다. 그는 회고록 곳곳에서 님펫을 향한 자신의 순수성을 강변하지만, 고백록을 뒤덮는 감시의 시선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엿보는 눈도 있고 수군거리는 혀도 있었다.”(93) 험버트 험버트는 님펫인 롤리타의 마성과 그것에 이끌리는 자신의 당위를 끈질기게 어필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의 창조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롤리타, 어쩌면 롤리타보다  생생한 롤리타였다. 그녀와 겹쳐지고 그녀를 에워싸면서 그녀와  사이에 두둥실  있는 롤리타,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는 – 아예 생명도 없는 – 롤리타였다.”(102) 롤리타는 그저 엄마를 잃고, 하루라도 빨리 변태적인 비정상적인 삶에서 달아나기를 원하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흥미롭게도 험버트 험버트가 죽인 사람은(동시에 롤리타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 퀼티(Quilty)이다. 퀼티(Quilty) 길티(Guilty) 변형시킨 말놀이(Word play) 자신과 롤리타를 끊임없이 뒤따르면서 감시한 죄의식이다. 한편으로 그는 험버트의 절반이다. 그게 험버트 험버트인 이유다.  『롤리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은 기록자 험버트와 그의 죄의식 험버트가 맞붙어 싸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박하면서도 가장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의 대면과 싸움을 글쓴이는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는 다시 맞붙어 몸싸움을 벌였다. 덩치만 커다랗고 재간은 형편없는 아이들처럼 서로 부둥켜안은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퀼티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노린내도 극심해서 그가  몸에 올라탈 때마다 숨이 콱콱 막혔다. 내가 그를 올라탔다. 우리가 나를 올라탔다. 그들이 그를 올라탔다. 우리가 우리를 올라탔다.”(480)

다시 말해 기록자 험버트는 자신을 옹호하지만, 그의 죄의식은 그의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의 고백을 믿지 말라. 문제는 독자들이 기록자 험버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가 흐릿해졌다는 점이다. 죽은 롤리타의 엄마 헤이즈(Haze 안개라는 )처럼 말이다. 이처럼 『롤리타』는 여러 겹의 마법으로 뒤덮여 있다. 소설은 독자들을 마법 (Magic circle) 안으로 끌어당겨 가두려고 한다. 『롤리타』를 선입견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험버트와 함께 길을 잃고  것이다.


4. 나보코프의 『롤리타』
소설 안에 기록자와 죄의식의 롤리타가 있다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있다. 그의 『롤리타』는 금기에 도전하는 소설이 아니다.  윤리적인 목적과는 무관하다. 나보코프는 교훈을 겨누지 않는다.

그녀의 자세는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테니스를 완벽하게 모방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전혀 없었다.”(369)

나보코프는 그녀(롤리타)  공이 상대방 네트 어디에 떨어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하는  롤리타가 공을 위로 던져 올린 다음 그것을 내리치는, 자세  자체다. 효과가 아니라 장면이다. 교훈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런 점에서 『롤리타』는 그의 문학론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독자는 헷갈린다. 험버트의 회고와 나보코프의 문학을 선명하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붙잡고 싶은 님펫이지만, 동시에 나보고프에게는 아름다움이자 ()이다.  점에서  작가는 묘하게 겹친다.   실제 인물과는 무관한 환영을 붙잡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성적 도착을 합리화하는 험버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기꾼이나 무당 같은 자들은 예술적 재능이 부수적 상징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반대다. 성은 예술의 시녀일 뿐이다.”(415) 추측하건대 나보코프를 향한 윤리적 비판에 그는 소설 속에서 충분히 답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보코프에게 『롤리타』와 롤리타는  모두가 아름다움을 향한 문학적 피조물이다.

끝으로, 『롤리타』는 어렵다.  작가를 구분하는 일도 그렇지만 나보코프가 은밀하게 숨겨놓은 말의 수수께끼와 말놀이들을 역자들의 도움 없이 얼마나 알아챌  있을지 모르겠다. 『주해판 롤리타』라는 책까지 따로 있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롤리타』는 유쾌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작가의 유머와 아름다움이 문장마다 성실하게 배어 있다. 『롤리타』가 흔히 가진 오명이,  책에 어울리는지 나는  모르겠다.



서평34. 『롤리타』/블라디므르 나보코프/문학동네/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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