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드리버>
1. 살려고 하는 의지를 어떻게 측정하겠어요
하얀 눈,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땅에 한 여성이 쓰러져 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얼었다. 죽은 것이다. 그녀는 피를 토했고, 피를 흘렸다. 그녀를 죽인 것은 폭력일까, 아니면 추위일까. 누가 그녀를 혹한으로 내몰았을까. 시신의 발에는 양말조차 없다. 그런 발로 눈밭을 얼마나 걸은 걸까.
아니, 이렇게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건 첫 장면이 아니다. 그녀는 결코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으니까. <윈드리버>는 이렇게 시작한다. 깜깜한 밤, 한 인디언 여성이 차갑고 끝없는 눈밭을 달린다. 눈 위라 느린데도, 달리고 또 달린다.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무엇이 그녀를 혹한에 달리게 했을까. 시신을 보며 “얼마나 걸었을까요?”라고 사무적으로 묻는 형사의 질문에, 코리는 답한다. “살려고 하는 의지를 어떻게 측정하겠어요. 얼마를 예상하든 그보다 더 먼 거리를 달렸을 겁니다.”
<윈드리버>는 범죄 스릴러다. 한 인디언 여성이 눈과 지루함 밖에는 없는 황량한 땅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녀의 이름은 나탈리다. 죽은 나탈리를 처음 발견한 이는 코리(제레미 레너)다. 인디언 여성과 결혼해서 인디언 보호구역인 ‘윈드리버’에 사는 그는, 가축을 위협하는 포식동물을 사냥하는 백인 헌터다. 동시에, 나탈리가 죽은 방식으로, 딸을 잃은 아빠이기도 하다. 코리는 FBI에서 온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을 도와 범인을 추적한다.
<윈드리버>는 범죄 스릴러지만 사건을 아슬아슬하게 비틀지도, 퍼즐 조각을 내밀어 끼워 맞춰보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영화에는 몸을 힘들게 하는 긴장감도, 흔한 반전도 없다. 필요 이상의 핏빛 폭력도, 여성의 신체 노출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에 영화는 무관심하다. 영화는 자극보다는 충실한 서사를, 스펙터클보다는 서늘한 담담함을 택한다. 영화는 흔적을 따라 자연스레 범인을 추적하면서, 사건을 둘러싼 세계에 주목한다. ‘인디언 보호’라는 미명 아래 ‘윈드리버’에 내몰린 이들과, 반복되는 폭력과 고통, 그럼에도 냉혹한 삶을 끌어안고 다시 걷는 ‘우리’를 화면 속 눈처럼 차가우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선으로 담아낸다.
얼핏 보면, <윈드리버>는 살인자를 쫓아가 통렬하게 복수하는 스릴러나, 더 나아가, 인디언들을 내몰고, 몰아낸 땅에서마저 그들을 착취하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나 그 우두머리 격인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쫓기고 빼앗긴 인디언들과 내쫓고 약탈하는 백인 사이의 인종문제를 다룬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2. 우리는 어떻게 '우리'일 수 있을까?
감독은 경계선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백인인 제레미 레너(코리 역)를 주인공으로 선택한다. 심지어 통렬한 복수는 그에 의해 이루어진다. 위험한 선택이 아닐까. 영화 속에서 그는 딸을 잃은 인디언 아버지에게 ‘우리’라고 말한다. 그들이 우리일 수 있을까? 어렵고 조심스러운 문제다.
한편, 사건을 맡은 책임자인 엘리자베스 올슨(제인 역) 역시 백인이다. 그녀는 ‘윈드리버’에 대해, 그곳에 사는 이들에 대해,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해하려고 한다’며 끙끙대고 애쓰는 인물이지만, 윈드리버 사람들은 그녀를 튕겨내고, 제인 역시 자신이 겉돈다는 걸 안다. 하얀 방한복을 입고 눈 속에 몸을 숨겨야 하는 사냥꾼 코리는, 하얀 눈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윈드리버 그 자체인 인물인 반면, 코리의 죽은 딸의 방한복을 빌려 입은 제인은 여전히 이방인이다. ‘이해’를 말하지만, 그것은 빌려 입은 옷일 뿐이다. 딸을 잃고 다시 딸의 친구를 잃은 코리에게 폭력과 그것이 주는 고통은 반복되는 일상인 반면, 제인에게 나탈리의 죽음은 해결해야 할 사건일 뿐인 것이다.
아직은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 같으니, ‘우리’ 이야기를 더 해보자. 영화 끝 무렵 코리는 범인(백인)을 잡아, 나탈리에게 한 짓을 자백하라고 한다(협박이다). 범인은 이렇게 답한다. “그래, 우리가 그랬다!”라고. “여자도 없고 여흥도 없는, 눈과 지루함 밖에 없는 곳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냐!”고 항변하듯 내지른다. 범인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
폭력으로 묶인 ‘우리’다. 꽉 막힌 세계를 핑계 삼아 폭력에 이유를 붙인 ‘우리’다. 눈 밖에 없는 땅과 지루함에게서 폭력으로 도망친 ‘우리’다. 흥미롭게도 나탈리의 오빠에게서도 같은 태도가 반복된다. 총과 마약에 찌든 나탈리의 오빠를 코리가 다그치자,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 항변하듯 말한다. 코리를 포함한 윈드리버 주민들이 고통으로 묶인 우리라면, 그것을 끌어안고 설원을 뛰어가는 우리라면, 그래서 강한 거라면, 나탈리를 폭행하고, 내몰고, 죽게 한 범인들과 나탈리의 오빠는 폭력으로 달아난 우리다. 폭력에 사연을 붙인 우리다. 그들은 폭력이라는 번지르르한 강함 뒤에 숨는다. 거기서만 연대한다. 그래서 허약하고 비루하다. 영화가 말하는 겨울, 혹한, 눈밭, 반복되는 고통을 그들은 마주 안고 뛰지 못한다.
3. ‘우리’는 더 먼 거리를 달려야 한다
나탈리는 중심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첫 장면과 영화 중반에 플래시백으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인디언 여성 피해자일 뿐이다. 멋진 말을 내뱉지도,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혹한 속 눈밭을, 힘겹지만 끈질기게 달려가는 첫 장면은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며 모두와 맞닿는다. 어쩌면, 모든 인물을 이끌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백인 주인공 코리는 그녀를 내레이션 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앞선 말을 수정해야겠다. 영화는 나탈리를 피해자로만 보도록 재현하지 않는다. 그녀의 첫 장면이 영화 전체를 감싸며, 계속 말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책임자였던 제인은? 영화 말미에 그녀는 총격전 끝에 총상을 입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병상에 누운 제인은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먹거린다. 공포와 고통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애쓴 후에야, 비로써 ‘우리’가 된 것이다. 그녀 역시 끈질기고 강하다.
백인 감독이, 두 명의 백인 주연으로 어떻게 경계에 대한,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건 패착이 아닐까. 오만이나 실수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가 원주민을 연기자를 통해 직접 목소리를 재현했다면 그것은 더 나은 영화가 되었을까? 글쎄.
<윈드리버>는 모색이다. 영화는 인디언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서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거리를 잃지 않으려고 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내가 바로 그다’ 따위의 소리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거다. 동시에 자기 자리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옮겨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분명히 어느 부분 영화는 문제적이다. 누구의 시선으로 써 내려갔는지를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더라도 멈추지 않고 우리이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갈 곳이 멀어, 더 가야 하더라도 말이다.
영화리뷰2. <윈드리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