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 이해는 오해다
‘이해는 오해다.’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십수 년 전 들었던 문장이다. 원래 있던 말인지, 그에게서 비롯한 표현인지는 분명치 않다. 오직 주어와 서술어 딱 두 단어로만 이루어져 단조로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선명한 저 문장은, 내 어딘가에 꽤 짙게 각인되어 남았다. 그리곤 종종 소환된다. 소통을 위해 건너오고 또 건너간 말이, 의도와 의미가 바뀐 채 상대에게 도착할 때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을 왜곡하는 오해 상자(misunderstanding box)라도 있는지, 언어는 생각만큼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이해는 드물고 오해는 평범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을 때, 저 짧은 말마디가 진실에 가까움을 확인한다.
하지만 아무리 단조롭고 제아무리 선명해도, 문학은, 특히 소설은 아포리즘에 만족하지 못한다. 시원하리만치 짧은 저 문장은 부분일지언정, 전체일 수는 없다. 소설은 자신으로 충분한 듯 구는 아포리즘을 참을 수 없다. 선명함에 만족하고 시원함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에게, 소설은 복잡하고 불분명한 이야기를 내민다. 자체로 충분한 듯 보이는 짧은 문장을, 혹은 누군가 애써 줄이고 또 줄여놓은 것 같은 가장 효율적인 문장을, 위아래 좌우 옆 사방에서 힘껏 잡아당겨 길게 늘어뜨려 놓는다(또 누군가 금세 줄여놓으려 하겠지만).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그런 책인지도 모른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한 인물의 진실을 추적하는 형식을 띤다. 그와 같은 드라마는 보통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그날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등 사건을 둘러싼 여러 겹의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고,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추어지며 진실에 근접해 가는 것이 추적극의 묘미다. 표적이 있고, 이야기는 표적을 향해 수렴해 간다. 그렇다면,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도 마찬가지일까. 독자들은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독자 이전의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 닐은 자신이 좇으려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소설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화자인 닐과, 주인공인 닐보다 독자의 시선을 더 사로잡는 엘리자베스 핀치와의 인연을, 혹은 두 인물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닐은 엘리자베스 핀치의 ‘문화와 문명’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 그녀를 만난다. 닐은 첫 수업부터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닐을 사로잡은 건, 이성으로써의 그녀가 아니라 선생 엘리자베스 핀치다. 닐에게 핀치의 교수법은 독특함과 새로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수업을 대하는 태도, 사고방식, 그녀의 문제 제기는 언제나 논쟁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일신교(monotheism)’, 엘리자베스 핀치가 말했다. ‘편집광(monomania)’, ‘일부일처제(monogamy)’, ‘단조로움(monotony)’, 모노라는 말로 시작해서 좋은 게 없죠. 그녀는 말을 끊었다. ‘모노그램(monogram)’ - 허영의 표시죠. 외눈 안경(monocle), 마찬가지. 단종 지배(monoculture) - 유럽 농천 사멸의 전조예요. ... 하지만 이 접두사가 인간사에 붙을 때는... 단일 언어 사용자(monoglor), 폐쇄적이고 자기기만적인 나라의 표시죠. 모노키니(monokini), 의복으로서나 어원으로서나 경박해요. 독점(monopoly)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늘 재앙이죠.”(24-25p)
“하지만 그녀는 격려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틀린 답이란 없어요, 모든 답이 틀렸다 해도.’”(61p)
1부는 엘리자베스 핀치의 강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닐만 매혹시켜서는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어당길 수 없기 때문이다. 닐과 함께 독자 역시 그녀의 강의에 참여한다. 강의는 반복된다. 추측하건대, 독자들 역시 닐과 같은 시선으로 핀치를 보고, 학생의 자리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매료될 것이고, 핀치의 예상치 못한 질문은 우리를 절절매는 학생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독자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줄리언 반스의 주장을 듣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 늘 그렇듯, 압도적인 지성과 철학적 풍성함으로 독자들을 휘어 감기 때문이다.
닐은 그런 그녀를, 뭐라 표현해야 할까. 존경했다? 충분치 않다. 사랑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닐은 그녀를 신앙했다. 그런 닐에게 엘리자베스 핀치는 점차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간다.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에게 이른바 모차르트에 딜레마에 관해 물었다. 삶은 아름답지만 슬픈가요, 아니면 슬프지만 아름다운 가요? 오늘의 파스타 두 접시를 사이에 놓고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자니 마치 신탁을 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은 필연적인 동시에 불가피하죠.’”(40p)
닐은 졸업 후에도 꾸준히 핀치를 만날 기회를 누리지만,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녀가 질병으로 죽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엘리자베스 핀치는 놀랍게도 자신의 자료를 닐에게 상속한다. 장례식 후 아파트에서 자료를 뒤적거리던 닐은 수첩 하나를 발견한다. 수첩 속 한 메모가 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J는 서른한 살에 죽다.”(92p)
● 2부 - 율리아누스
2부는 J의 일대기이다. J가 누굴까. 닐에 따르면 J는 율리아누스이다. 율리아누스는 로마 황제였던 인물로, 당시 주요 종교로 등극한 그리스도교를 배척해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리기도 했다. 즉 일신교(monotheism)적 세계관에 반대했던 인물로 엘리자베스 핀치가 강의에서 다룬 인물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핀치의 강의에 따르면, 한 시인은 율리아누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대가 이겼다. 오, 창백한 갈릴리인이여. 세상은 그대의 숨으로 잿빛이 되었구나.
우리는 레테의 물을 마셨고 죽음을 배불리 먹었다.”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어느 장군의 말처럼, 율리아누스가 죽기 전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언이지만, 율리아누스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엘리자베스의 지적, 철학적 탐구가 그리스도교의 배교자로 여겨졌던 율리아누스를, 혹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향했다는 점이다.
메모가 적힌 수첩과 함께 율리아누스에 관한 참고 목록이 잔뜩 있고, 닐 자신은 과거에 수업과제를 제출하지 않아 엘리자베스 핀치를 실망하게 한 적이 있다. 게다가 닐의 별명은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이다. 이 모든 조건은 닐에게 계시처럼 당도해서, 닐은 사명을 받은 듯 율리아누스의 전기를 완성하기로 작정한다. 어쩌면 그것이 엘리자베스 핀치가 남겨 놓은 마지막 과제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2부는 닐이 쓴 율리아누스의 전기이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닐의 독자가 된 우리는 난데없이 나타난 율리아누스에 관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될까?
닐은 율리아누스를 추적한다. 율리아누스를 연구해 온 여러 학자의 자료, 정보, 해석 등을 따라 율리아누스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나간다. 닐의 기록을 통해 독자는 율리아누스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번뜩이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 핀치의 기대(?)처럼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일신교를 막아섰을 지적인 황제였을지, 아니면 미치광이 학살자였는지, 아니면 종잡을 수 없는 해괴한 인물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까. 닐은 과제를 완성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율리아누스에 관해 일관성 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 흥미로우면서도 풍성한 자료가 쌓일수록 율리아누스는 파악 가능한 인물로 수렴해 가기는커녕 도리어 발산해 간다. 보통의 추적극이 점차 진실에 다가가는 것과는 달리, 닐의 기록이 진전될수록 독자들은 율리아누스에게서 점점 멀어져 간다.
● 3부 -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
율리아누스 쓰기를 다 마친 닐은 이제 엘리자베스 핀치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 완수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닐은 탐정이라도 된 듯 무겁게 그녀의 삶을 추적하지만, 엘리자베스 핀치는 사뿐하게 닐의 이해를 비켜나간다. 닐은 꼭 묵직한 각오로 그녀를 사로잡으려 하지만, 그녀는 달아나고 퍼져나간다. 닐은 오랜만에 만난 옛 여자 친구에게서 엘리자베스핀치에 관한 의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가 여성 전용 수영장에 다녔다는 별 것 아닌 이야기다.
“그 말에 나는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갑자기, 약간은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EF를 묘사할 때 나는 그녀가 맨다리를 드러낸 적이 없다고, 따라서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278p)
즉 그녀는 거대한 진실에서 비켜가거나 엄청난 반전을 지녀 닐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일종의 사명감과 긴장감을 머금고 그녀의 말과 행위를 추적해 가는 닐을 당황하게 한 건, 엄중하고 진중했던 그녀의 말과 삶의 불일치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닐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작고 다양한 삶의 이면이었다. 결국, 닐은 자신이 엘리자베스 핀치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 자신이 알고 있는 건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만 했다.
“사람들이 내가 한 일과 한 말로 내가 누구였는지 알아내려 하지 못하게 하라.”(205p)
● 자신으로 살려면 잘못 알아야 한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의 원제는 『ELIZABETH FINCH』이다. 과감한 제목이다. 대중은 들어본 적도 없는, 소설 속 인물을 제목으로 내세운 셈이니 말이다. 세계적인 작가의 자신감이었을까. 줄리언 반스는 무슨 이유로 인물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웠을까.
그건 율리아누스라는 생뚱맞은 인물이 2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더듬어보자면, 율리아누스의 반대편에 ‘창백한 갈릴리인’ 즉 ‘나사렛 예수’가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관해 이미 『예수전』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연구와 해석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핀치가(혹은 줄리언 반즈가) 온 세상이 주목하고 신앙하는 승리자에게 다시 관심을 줄 리도, 그 일을 반복할 리도 없다. 그의 목소리와 행위를 통해 대상을 ‘안다’고 주장하는 일은, 그들의 목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핀치』는 마치 『예수전』처럼, 신앙적 상상력과 신화적 기억력이 혼합되어 쓰인 책인지도 모른다. 다만, 줄리언 반스가 관심하는 건, 대상이 아니라, 잘 못 앎에도 계속 알려고 하는 우리다. 그는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는 건, 오해에 불과하다는 뻔한 소리를 반복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앎과 삶은 계속될 것이고, 어쩌면 그 잘못 앎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통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건, 율리아누스에 관한 정보도, 엘리자베스 핀치에 대한 동경도 아니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며, 그 알 수 없는 복잡한 세계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쓰기를 이어가려고 하는 태도이다.
“저널리즘은 명확함을 위해 쓰지만, 소설은 세계의 복잡성을 반영하기 위해 쓴다.”(줄리언 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