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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1. 2019

개츠비는 왜 개츠비가 되었을까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나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만희’와 ‘만선’인데, 원래는 ‘만희’로 출생등록을 하려 했으나 동사무소 직원이 만희(萬喜)에 들어가는 한자 ‘희’(喜)를 ‘선’(善)으로 착각한 탓에 ‘만선’이 호적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말이 되나 싶기는 한데, 어쨌든 그 후로 두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만희’라는 이름을 훨씬 좋아해서 신원확인이 필요한 곳을 제외하고는 ‘만희’로 나를 소개한다. 나는 내 뜻과 상관없이 두 이름을 갖게 된 경우지만,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촌스러워서, 종교적인 이유로, 현재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등 여러 이유로 지금까지 호명되었던 이름을 뒤로하고, 새로운 이름을 선택한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뀐 이름은 그의 삶을 어디로 안내할까.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의 주인공인 개츠비(Gatsby) 역시 새로운 이름을 선택한다. 개츠비의 원래 이름은 ‘제임스 개츠’였으나 “그는 열일곱 살에, 최초로 인생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 특별한 순간에, 이름을 바”(124)꾼다. 그는 왜 이름을 바꾸었을까. 바꾼 이름 앞에는 어떻게 ‘Great'가 붙게 되었을까.

<위대한 개츠비>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 덕분에 급격하게 성장한 1900년대 초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호화로운 파티장면으로도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에 취해 비틀거리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희화화하는 동시에, 그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결핍과 공허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혹은 곧 일어날 미국의 경제대공황(1929)을 예언한 소설일까? *누군가가 지적하듯, 좋은 소설은 시대를 억지로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 속에 시대가 담겨 있을 뿐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시대를 풍자하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문학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의 이상, 낭만, 희망, 그리고 거짓, 공허, 결핍 등을 작가만의 세련되고 섬세한 필체와 아이러니한 서술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다.  

소설 속 화자는 닉이다. 그는 서부출신으로 출세를 꿈꾸며 뉴욕이 있는 동부로 향한다. 그곳에서 닉은 친척인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인 톰, 그리고 개츠비를 만나게 된다. 데이지와 톰은 동부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인물들로, *이스트에그에 살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대저택과 막대한 부(富)를 누리면서도, 삶을 권태로워하고 늘 무엇인가를 향한 갈증을 느낀다. 닉은 톰을 이렇게 표현한다. 스물한 살에 이미 인생의 정상에 도달해서  이후로는 모든  내리막길이라는 인상이 드는,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13)

개츠비는, 5년 전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데이지를 사랑하는 인물로, 오직 그녀와 다시 만나기 위해 지난 5년을 살아온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저택에서 새어나오는 초록빛 불빛이 보이는, 건너편 웨스트에그에 살고 있으며 그가 주최한 호사스러운 파티는 사실상 데이지를 초대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데이지를 제외한 무엇도 개츠비에게는 의미가 없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닉은 이렇게 표현한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는데, 데이지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이는 반응에 따라 자신의 집을 속속들이 재평가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그녀가 실제로 나타난 마당에  모든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 그는 간간히 자신의 소유물을 멍하게 바라보았다.”(100)

결국 닉의 도움을 통해 개츠비와 데이지는 다시 만나게 되고 둘은 다시 낭만적인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개츠비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현재의 데이지 뿐 아니라, 지난 5년간 그녀의 사랑까지도 전부 되찾아야만 하는 인물이다. 모두가 함께한 자리에서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말한다. 이제 아무 상관없어. 그에게 진실만 말해. 결코 당신(남편 ) 사랑한  없다고. 그럼 모든  영원히 지워지는 거야.”(143)

한편, 데이지는 개츠비가 밀주와 그 외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거부가 됐다는 톰의 말을 듣자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개츠비가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데이지 자신의 낭만과 환상을 개츠비가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영원히 서부인일 수 밖에 없으며, 결코 자신들과 같은 동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잘못 겨눈 화살과 오해가 뒤엉키면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서늘해진 황혼을 지나 죽음을 향해 계속 질주했다."(148)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얼핏 보면 내로남불을 다루는 치정소설 같기도, 혹은 파멸로 향하는 로맨스를 그린 통속적인 서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개츠비 앞에 붙은 'Great' 라는 수식은 여전히 유효한 걸까? 심지어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거부(巨富)가 된 그에게 말이다.

"저것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필요 없어. 내가 벌써  확인해 봤거든. 저건  진짜야."(52)

소설 초반, 개츠비가 개최한 파티가 한창일 때, 홀로 서재에 있던 '부엉이 안경을 낀 중년 남자'가 개츠비의 책들을 보며 외친 말이다. 개츠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제멋대로 개츠비를 상상하며 판단하던 것과 상반되는 장면이다. 훗날 누구도 찾지 않던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진짜'를 외쳤던 중년 남성만이 참석한다. 마치 성서에서 예수의 죽음을 유일하게 받아들이고 준비했던 한 여인처럼 말이다. 그는 서재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헐리우드식 연기(acting)와 허세만이 넘실대는 그 세계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진짜(real)를 외친 것일까.

개츠비가 어떤 수단으로 성공을 이루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소설<위대한 개츠비>가 갖는 아이러니인데, 개츠비의 이름 앞에 'Great'가 붙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오직 그 만이 손을 뻗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지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을 때도 그는 여전히 초록 불빛을 향해 손을 내민다. 마치 처연한 실패 끝에도 담담하게 내일을 준비하는 노인처럼.(소설<노인과 바다>) 모두가 결핍과 공허로 가득했을 때, 개츠비만이 자신으로 충만했다. 모두가 길을 잃었을 때, 그 만이 길을 향했다. 모두가 거짓이었을 때, 개츠비만이 진실이었다.
 
개츠비는 자신이 겨눈 표적에 똑바로 화살을 쏘았다. 단 한 발의 화살을. 여전히 표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화살을 말이다. 자신의 이름을 개츠비로 바꾼, 데이지를 만나기 전 열 일곱 살 순간부터 이미 그는 한 곳 만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개츠비가 되고자 하는 자신을 말이다. 어쩌면 그는 데이지를 사랑한 자신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겨냥한 표적을 뭐라 불러도 좋다. 사랑이든, 이상과 꿈이든, 아니면 손을 내밀수록  멀리 달아나는 희망이든 말이다.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물러나는 환희의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면 우리는  빨리 달릴 것이며,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맑은  아침에는... 그래서 우리는 조류를 거슬러 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196)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에그와 대조되는 지역으로 동부속의 동부라고 말할 수 있다.
*2013년 9월 12일자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 참고.


서평8.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체럴드/문학동네,열린책들/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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