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치즈> - 빌렘 엘스호트

죽기전에꼭읽어야할책1001 다읽기 챌린지

by 정앵무

346. 치즈

작가명: 빌렘 엘스호트(Willem Elsschot)
작가 생몰연도: 1892년(벨기에)–1960년
작가 본명: Alfons-Jozef de Ridder
원제: Kaas
초판 발행연도: 1933년
초판 발행처: P.N. Van Kampen & Zoon


⭐️읽은 도서 정보: <치즈> 빌렘 엘스호트 지음, 금경숙 옮김/출판사 휴머니스트


★ 한줄 감상평 ★
좌절과 웃음이 뒤섞인 샐러리맨의 일장춘몽 치즈 판타지


올해 들어서 너무 심각한 책들만 읽고 있다.
유머가 필요하다. 유우우우우머가!!!!!!!!
극과 극은 만난다고 했던가.
나는 아주 심각하고 어두운 것들, 아니면 반대로 꽁트나 시트콤 같은 코미디에 환장하는 양 극단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 공포와 극단적 유머는 표면적으로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갤로스 유머나 블랙 코미디처럼.
아무튼 인생이 심각하게 보자면 밑도 끝도 없이 심각한 것이지만 또 가볍게 보자면 한없이 우스꽝스러운 것이기에.
아무리 그지 깽깽이같은 현실이라도 그 속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의 독백으로 인용되어 유명한 미국 시인 엘라 윌콕스의 시 '고독'의 구절처럼 울어봤자 세상은 내 슬픔에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 웃어라.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 이 말이야!!!!!!!!!
웃으라고!!!!!!!!!

아 뭐 어쨌든 진정하고 그래서 이번엔 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짧은 책을 고르기 위해 1001 목록을 쭉 훑어보다가 '치즈'라는 간결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치즈...치즈라.....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책 제목이 음식 이름이면 뭔가 호기심이 든다.
그리고 치즈는 맛있잖아..
치즈 먹고 싶네... 브리 치즈.. 카망베르... 블루치즈도 먹고 싶고 츄릅..이런 생각을 하다가 분량도 150페이지 남짓으로 짤막하고 무엇보다 책 소개에 아래와 같이 쓰여있었는데

'마음 한구석에 사직서 한 장씩은 품고 있는
직장인들 앞에 펼쳐진 외롭고 웃긴 치즈의 세계'

이 문구가 나에게 읽고 싶다는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저 '외롭고 웃긴'이라는 표현!!!!난 외롭고 웃긴 거 너무 좋아한다고!
하여튼 그래서 읽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이다. 자조적이고 씁쓸하면서도 초연한 유머가 그 위를 타고 마치 치즈가 흘러내리듯 사르르르 녹아내린다. 작가인 엘스호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 정도로. (그런데 아쉽게 엘스호트의 다른 책들은 국내 번역본이 없음..ㅠ흑ㅠㅠ)

이 책은 며칠 전에 나온 신작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시대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전혀 느낄 수가 없는데 놀랍게도 1933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거의 100년 전에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인공 프란스 라르만스의 모습은 현재를 사는 직장인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여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알다시피 내 나이가 오십이 코앞이고 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흔적은 당연히 내 몸에 새겨져 있지. 사무원은 고분고분한 사람들이야. ...(중략)... 사무원들은 대체로 전문성도 별로 없는 데다 서로 워낙 비슷비슷해서 쉰 살 먹은 경력직이라 해도 하루아침에 뻥 차버리고, 똑같이 일을 잘하면서도 싸게 먹히는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지. 그런 물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자식들도 있기에 나는 낯선 사람과 시비도 붙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며 살아왔네. 그 사람이 우리 회사 사장님과 아는 사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전차 안에서 누가 나를 밀면 그냥 밀렸고 누가 내 발을 밟아도 발끈하지도 않았지.
- 34p


쉰 살이 코앞인 프란스 라르만스는 종합 해양 조선 회사에 재직 중인 평범한 사무원이다. 그에게는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 장례식에 조문 온 형님의 친구이자 유서 깊고 부유한 가문의 신사인 판스혼베커 씨의 초대로 그의 지인들 모임에 참석한다. 대부분 판사, 변호사, 전현직 사업가들로 이루어진 이 허영심 가득한 모임에서 라르만스의 존재는 구성원들에게 그 어떤 흥미나 관심도 끌지 못한다.



판스혼베커 씨는 모임에 낯선 손님이 등장하면, 그 신입을 쫙 소개하는데 원래 신분보다 최소한 두 배는 부풀려서 말하지. 부장은 사장으로, 사복 차림의 대령은 장군으로 소개하는 식이야. 하지만 내 경우는 쉽지 않았네. 알다시피 나는 '종합 해양 조선 회사'의 사무원 아닌가? 그러니 판스혼베커 씨가 딱히 밀고 나갈 거리가 없는 것이지. 회사원에게는 거룩한 뭔가가 없지. 그저 맨몸으로 이 세상에 서 있는 인생들인걸.
- 26p



이 '사설 통신' 모임에서 라르만스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 병풍처럼 앉아 그들이 떠들어대는 허세스러운 이야기들, 예를 들어 자신들이 휴가 때 얼마나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먹었고, 자신들의 세입자들이 임대료를 꼬박꼬박 내지 않는다는 둥의 불평들을 묵묵히 듣는다. 그러던 중 판스혼베커 씨는 라르만스에게 네덜란드의 큰 치즈 회사의 벨기에 대리점을 맡아 사업을 해볼 것을 제안한다. "먹는장사는 망할 일이 없어. 어쨌거나 사람들은 먹어야 하니까."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 제안과 동시에 라르만스의 가슴은 뛰기 시작하고, 그는 30년간 회사에서 보낸 머슴 같은 생활을 청산하고 당당히 사업가로서 성공할 꿈에 부푼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회사를 바로 그만두는 것은 위험하며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면 그때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한다. 라르만스는 아내의 말에 따라 의사인 그의 형님에게 부탁해 '신경증'이라는 가짜 진단서를 받아 회사로부터 3개월의 병가를 허락받는다. 그는 집 욕실 옆의 조그만 방 하나를 사무실로 꾸미고 그의 '치즈꿈'을 실현하기 위해 판스혼베커 씨가 소개해 준 치즈 회사와 사업 계약을 체결한다. 결과는??

---------------중간 생략----------------


망함.

사업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라르만스에게 어쩌면 치즈로 이루어진 달콤한 꿈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허황된 신기루 같은 것이었을 터. 결국 팔리지 않는 치즈를 도로 창고에 가져다 놓고 사업을 접기로 결정한 라르만스는 아내를 끌어안고 울고 만다. 다행히 현명한 아내의 조언을 들은 덕에 그는 원래 다니던 종합 해양 조선 회사의 평범한 사무원으로 돌아간다.

작품 속 문체는 라르만스의 1인칭 시점에서 그가 제3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근하고 간결한 어투로 서술되는데 그게 이 작품의 매력을 더욱 끌어올린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그가 느끼는 비애와 좌절이 담담하면서도 동시에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시선에서 묘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웃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치즈 판매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동네 치즈 상점에 직접 영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지만 가게 밖 진열장에서 한참을 망설인다. 옆에 있던 카페에서 맥주 두 잔을 비우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돌격'을 외치며 눈을 질끈 감고 겨우 상점에 들어서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참 짠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아버지는 강인하며 늘 한결같아야 하지. 직업이야 시장이건 책을 만드는 사람이건 사무원이건 일용 노동자이건 별문제가 되지 않아. 하지만 그게 무슨 일이건 오랜 세월 자신의 의무를 다해온 사람이 나처럼 누가 하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뜬금없이 치즈 사업을 한답시고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펼치면, 그런 사람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나?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네. 그런 경우 한 나라의 장관이라면 사임을 하고 시야에서 사라지겠지. 하지만 누군가의 배우자이자 아버지는 자살이라도 하지 않는 한 결코 사임할 수 없네.
- 129p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거대한 조직 속 언제나 교체 가능한 흔하디 흔한 작은 부품 중 하나일 뿐인 인생.
이 책을 읽으니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모던타임즈가 1936년작이니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구나. 역시 명작은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나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조연을 자처하려는 자가 어디 있을까. 누구나 처음엔 꿈이 있었고, 내 삶의 주인이 '나'이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어느덧 삶의 무대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저 구석진 자리, 조명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것 같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우두커니 서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사람을 씁쓸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회사원에게는 없는 '거룩한 무언가'를 위한 라르만스의 치즈 왕국은 비록 잠깐의 일탈로 끝나버렸지만 그의 삶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출근을 하고,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언제나 그렇듯 그렇게 집으로 향할 것이다.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다지 거창한 게 아닐지 모른다. 사업 실패 후 라르만스가 어머니의 묘지에 사다놓은 적갈색의 아름다운 국화 다발처럼, 반복되는 인간사의 굴레 그 권태로운 일상 속 한 다발의 위트.
그것만으로 당신의 인생은 충분히 거룩하다.

작가의 이전글291. <소송> - 프란츠 카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