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공간이 필요할 때 떠나는 주말여행 #1
평소보다 한 시간 반 이르게 퇴근한 금요일 오후, 급히 들른 미용실에서 길어진 머리를 다듬고 경주행 버스에 올랐다. 차를 산 이후엔 늘 운전해서 여행을 다니곤 해서, 장시간 버스를 타는 건 오래간만의 일이다. 코로나 이후의 버스는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해서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아쉽다. 주말을 맞아 일상에서 탈출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스는 느리게 달렸다. 타인이 운전해주는 편안함이 새삼스럽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
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194
서울->경주 우등버스 30,500원
눈을 한번 감았다 뜰 때마다 바깥 하늘의 색깔이 점차 어두워진다.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짙은 쪽빛 하늘을 멍하니 즐겼다. 경주터미널에 도착한 건 저녁 10시 반이 넘어서였다. 휴게소를 한 번밖에 들르지 않았는데도 4시간 반이나 걸린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택시를 잡아타고 먼저 온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막걸리 집으로 향했다.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의 통금이 11:30이라 반가움의 포옹은 짧았고 술잔마다 담긴 이야기는 진했다. 칼칼한 두부찌개의 두부를 다 건져먹고 해물파전 한 조각과 두어 잔 분량의 술을 남긴 채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대학교 때 잠깐 살았던 기숙사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숙소에 도착해 못다 한 이야기를 페트병에 담긴 탄산수와 함께 풀어놓았다.
<영막걸리>
경북 경주시 원효로 180
정구지전 8,000원, 두부찌개 8,000원, 소주 1병 4,000원, 막걸리 4,000원
막걸리에 담았다 꺼낸 듯한 장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통금 덕분에 이만하길 다행이다 싶은 것이다. 숙소를 잡아놓고도 외박을 계획하던 지난밤의 패기가 만용으로 느껴지는 아침이다. 차례로 씻고 나와 반숙 계란 프라이를 올린 토스트와 시리얼, 그리고 여행마다 챙겨 오는 홍차 한 잔으로 해장을 마쳤다. 게스트하우스 조식에는 뜨거운 차에 우유를 조금 추가해서 먹는 게 나만의 아침맞이 의식이다.
설거지를 하고 짐을 챙기고 보니 버스가 3분 후에 도착한단다. 아침 달리기가 건강에 좋단다. 무사히 버스에 올라 숨을 가다듬고 불국사로 향했다. 가는 길목의 창문을 채우는 것은 끝없는 녹음이다. 그래, 이 무한히 이어지는 잔디가 그리워서 경주에 왔다.
<딮게스트하우스> @staydeeep
경북 경주시 북정로 63-7
4인실 1박 25,000원
예약 : https://deeep.modoo.at/
날은 적당히 흐려서 걷기 딱 좋다. 버스에서 내려 불국사까지 걸어 올라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자 비로소 경주에 온 실감이 났다. 어렸을 때 기억보다도 탑이 커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아직 살아있는 건축가들의 작품도 사라진 경우가 많은데, 무려 1,270년 전에 지어진 탑이 아직도 굳건히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내부를 3층 규모의 천정 구조물로 만든 대웅전은 신라 건축의 화려함을 뽐낸다. 조각보처럼 네모나게 조각조각 이어진 우물천정이 참 곱다. 구조물이 예술로 승화한 형태를 정말 좋아한다. 유럽의 어느 성당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우아한 작품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나한전, 관음전 등의 건물을 돌아다니며 한여름의 수학여행을 만끽했다.
<불국사>
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
입장료 6,000원
석굴암은 불국사에서 한 시간 이상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물론 차를 가지고 오면 수고가 덜하지만, 경주까지 오는 길을 버스기사에게 외주를 줘버린 여행객 두 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여정의 절반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져 방심하다가, 나머지 절반에서 끝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호흡이 턱끝까지 차고 올라와 숨쉬기 버거웠지만, 땀이 주는 묘한 만족감이 있다.
두어 번 쉬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석굴암에 가까워졌는지 종 울리는 소리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울린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흙으로 잘 다져놓은 마당에 서자 오른쪽으로 종각이 보인다. 스님이 울리는 줄 알았던 종소리는 가족 단위로 온 여행객들이 한 타종 당 천 원 이상 시주하고 울리는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산을 오르는 데 다 써버린 에너지를 빠삐코로 급히 충전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 위에 화려하게 단청을 칠한 건물 뒤로 능처럼 잔디가 둥글게 솟은 모습이 보인다. 바위를 깎아 쌓아 올려 만든, 세계 유일의 인공 석굴인 석굴암의 윗면이다. 어렸을 적 수학여행으로 왔을 땐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건물도 없었던 것 같은데, 관리와 보존 때문에 유리 칸막이도 건물도 새로 세운 모양이다. 유리 때문에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다시 만난 석굴암은 감동 그 자체라는 거친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정갈하게 다듬은 석가모니상이 은은한 미소를 디고 가운데 앉아 있고, 그 위로 커다란 돌을 일일이 깎아 쌓아 올린 둥근 천장이 덮고 있다. 양옆으로는 부조로 깎은 석상이 있다. 밝은 회색의 석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착시가 생긴다. 여기까지 온 여정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석굴암>
경북 경주시 진현동 999
입장료 6,000원
힘들게 올라왔던 길을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내려왔다. 불국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이미 경주를 온 목적은 달성한 후인 데다 체력을 모두 소진해 아무 생각이 없던 차에 친구가 육회가 올라간 물회를 알아왔다고 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택시에서 내려 가게 입구 쪽으로 가는데 직원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빨리 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니 원래 점심 주문 마감인데 택시를 타고 와서 우리까지만 받아준단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서 따끈따끈하게 익은 벤치에 앉아 기다리니 정말로 그다음에 오는 손님들은 돌려보낸다. 먹을 복은 타고난 모양이다. 심지어 원래는 한 시간 이상 기다려 먹어야 하는 맛집이라는데,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20분 정도만 기다리고 입장했다.
로봇이 서빙해준 그릇에 적당히 달콤하고 시원한 물회 육수에 길게 채 썬 배와 육회가 넉넉하게 담겼다. 반찬 하나하나가 다 감탄사를 불러온다. 시장이 반찬이긴 하지만, 밥알 한 톨까지 맛있을 일인가 싶다. 정신없이 물회를 떠먹고 있을 때 함께 주문했던 소고기 파전이 나왔다. 대파의 달콤한 맛이 느끼할 수도 있는 고기의 맛을 적당히 감싸준다. 마지막에 소고기 뭇국에 말아먹은 밥마저 완벽한 한 끼였다. 이렇게 멋진 식당을 알아온 데다 체력과 식성과 먹성, 거기에 먹는 속도까지 비슷한 친구에게 반할 뻔했다. 무슨 음식이 담겨있었는지 알아채지 정도로 그릇을 싹싹 비우고 나서야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함양집>
경북 경주시 보불로 287
한우물회 13,000원, 소고기 파전 17,000원
오전부터 달리기에 산행에 격한 스케줄을 소화한 데다 맛있는 식사까지 하고 나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곯아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전히 눈을 반만 뜨고 있는 친구를 깨워 버스에서 내린 후 대릉원 옆 황리단길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요새 트렌드가 옛날 간판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라는데, 이 카페도 그런 트렌드를 따른 곳 중 하나다. 나무 현판에 영어로 카페 이름을 새겨서 건 현판 위로 예스러운 느낌의 ‘경주 체육관’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당을 채워 줄 티라미수와 함께 각자 취향대로 커피를 주문하고 바 테이블에 앉았다. 이곳은 카페와 서점을 겸하고 있다. 바 테이블과 홀 사이를 가로지르는 널찍한 매대에 카페 주인의 취향이 돋보이는 멋진 큐레이션의 책들과 경주의 지역 상점에서 만든 상품들이 놓여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볼거리가 충분하다. 바 뒤로 작은 마당이 있고, 그 건너에 별동이 있는데 그 안에서 직접 로스팅도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정성 들여 내린 커피가 자리에 놓였다. 페루의 산 마틴 지역에서 왔다는 커피는 시원한 신맛으로 들어와 고소한 맛이 오래 남았다. 버스에서 잠을 잔 덕분인지 에너지가 충전되어 글을 쓰고 싶은데 아이패드를 숙소에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빌려 티라미수를 포크로 파먹으며 여행기를 썼다. 친구는 그 사이에 마당에 나가서 햇볕을 즐기고 매대에 놓인 책 한 권을 다 읽고 구매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어른들의 수학여행은 참 재미나다. 모든 것을 함께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면에서 말이다. 우리는 각자가 사는 곳에서 알아서 버스를 예매해 경주로 왔고, 함께 불국사와 석굴암을 돌아보고 카페에 왔지만, 한 공간 안에서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개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곧 저녁 즈음에 추가로 두 명의 친구가 버스를 타고 경주에 도착할 예정이다.
<향미사> @hyangmisa
경북 경주시 보불로 287
페루 산 마틴 G1 오가닉 디카페인 5,000원, 홈메이드 티라미수 6,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