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은?? 코를 베어버리는 것이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을 읽다가 발견했다.
1893년 10월 10일 코가 베인 여인
현재 부인 병원엔 간통을 하다 걸려 남편이 코와 손가락을 베어버린 여자가 있다. 닥터 메리 커틀러(Dr. Mary Cutler)는 새 코를 만들어주는 수술을 하려 한다. 우리 어학선생은 이게 일반적인 처벌이며 어떤 경우에는 죽이기도 하나 살인은 어려우니까 큰 고통을 주고 외모에 손상을 가한다고 했다. 조선엔 정조를 지키는 남자가 드문데, 남자의 코와 손가락은 누가 베는지?
처음 그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설마?? 남편이 아내의 코를?? 그럴 리가?? 했다. 언제, 누가, 어디서..로 기술된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면 믿고 싶지 않았다. 자료를 찾기 위해 논문들도 보고 책도 많이 찾아 보았지만, 대부분의 기록이 '코를 베었다더라' 정도였고, 그나마 정확한 기록은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꽤 많은 수가 코가 잘려나간 여인들을 보았다"고 보고했다는 내용의 논문과 책이었다.
진짜 있었던 일이었다!
불과 120여 년 전인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 시절 우린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
서양인 선교사들과 일본인의 눈으로 말고, 지금 나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다.
부족하지만 찾고자 했던 기록을 찾았다.
조혼이 성행했다. 10살, 12살이면 약간의 돈에 결혼할 남자의 집에 팔려가 종처럼 일해야 했다.
남편은 동반자가 아니라 주인이었고, 걸을 때는 남편과 나란히 걸을 수도 없었으며, 한상에서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이 바닥도 없는 부엌에서 남는 음식으로 밥을 먹었고, 남편이 외도를 하고 첩을 몇 명씩 들이더라도 말할 수도 없었다. 반면에 여자들의 최대 덕목은 정절이었다.
일부일처제는 여자들에게만 적용되었고, 양반가의 여인은 남편이 죽더라도 재가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여인들의 경우 남편의 친척들이 자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득이 되는 곳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다. 또한 의지할 곳 없을 때에는 뭇 사내들이 장례를 치른 바로 그날로 데려가 아내나 첩으로 삼기도 했다.
칠거지악을 범한다면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칠거지악은 시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죄, 아들을 못 낳은 죄, 부정한 죄, 투기하는 죄, 남의 것을 훔치는 죄, 간질이나 나병 같은 나쁜 병이 있을 때, 말이 많은 죄이다.
멸시받고 지각없는 존재였던 여성은 이름마저 없었다. 태어났을 때는 가족 내의 아이들과 구분되는, 예를 들어 섭섭이, 고만이.. 등등 었다가 결혼하면, 누구의 아내로(대체로 ~댁이라고 많이 불렀다. 서울댁, 연천댁 등등), 아이를 낳으면 누구의 엄마로 살아간다. 개신교 신자로 세례를 받았던 조선 여성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지어진 자신만의 이름을 얻었다.
"옛날 양반집 풍속에는 여자가 문밖 출입을 하려면 보교나 가마를 타고 앞에 하인을 세우고야 출입을 하였으므로 문벌을 가진 가문에 태어나 그와 같은 양반집으로 가서 살게 된 나는 좀처럼 문밖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럭저럭 내 나이 많아가니 남편 보기에 젊어서만치 아름답지 못하였던지 그는 첩을 얻어 살며 나를 모른 체함으로...." 전삼덕이라는 여인의 말이다.(*이덕주님의 '한국교회의 처음 여성들'에서 인용)
축첩이 가능한 시기였기에 여인들은 '투기'라는 칠거지악에 몰려 쫓겨날 까 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인들은 낮에 나다니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노비나 어린아이들만이 여기서 자유로왔다. 중류 계층 이상의 여인들은 외출할 때 녹색의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고, 다른 여인들은 쓰개치마를 사용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자신을 도와주는 학교의 두 소녀 중 한 명이 일본인 소녀라 다행이라고 일기에 썼다. 단지 그 일본인 소녀가 낮에 자유롭게 밖에 나다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끝나갈 무렵 유교적 관습에 치우친 이 나라는 삐뚤어져 있었다.
여성은 남성의 종속물이며 이름 없는 존재였다.
여성 전용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지고, 여인들이 같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ㄱ"자 예배당이 지어졌다.
복음을 전하려던 선교사들로 인해 많은 여인들이 한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었다.
담장 밖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된 여인들은 용기를 내어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 좋은 씨앗
매티 윌콕스 노블 (Mattie Wilcox Noble 1872~1956)은 조선으로 부임하는 선교사 남편 아더와 1892년 내한했고,1934년 남편이 은퇴할 때 같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매티 노블의 일지를 번역하여 출간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