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스페인 여행기 0

'꽃할배'가 김을 빼도 나는 가기로 했다.

by 윤승민
20180302_095154.jpg 흔한 구엘 공원과 바르셀로나. 그리고 대서양 풍경 ⓒ동굴맨


여행에서 돌아온 지 열흘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났다. (사실 글 초안을 써 놓고 한달을 더 방치했다.) 여권과 커버 사이에 끼워두었던 비행기 보딩패스들을 꺼내 티켓북에 꽂았다. 미루고 또 미뤘던 여행기를 이제사 써보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으며 일종의 의식을 치렀다. 보딩 패스 조각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며 여행 일정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3월 초, 스페인을 다녀왔다. 휴가는 총 8일을 썼지만 스페인에서 머문 건 5일이었다. 나름 경유 시간을 줄이려 했는데도 비행시간이 워낙 길었다. 5일은 바르셀로나-세비야-그라나다 등 세 도시를 둘러보기엔 다소 빡빡한 일정이란 건 현지에서 몸으로 부딪치고 나서야 알았다. 물론, 주어진 휴가 기간이란 게 있기에 더 많은 시간을 여행에 할애할 수는 없었다. 여름휴가를 당겨 겨울에 몰아가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휴가 없이 여름을 나는 게 내게는 참 어려운 일이다.


스페인 여행은, 아니 스페인이란 나라는 오래전부터 간직 한 마음속 '로망'이었다. '왜 스페인이었냐'고 물을 때마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수업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1학년 2학기 때 나는 나름 당시로서는 대담하게 독강(혼자 수업을 듣는 것)을 택했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예술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교수님은 스페인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보이는 스페인 곳곳의 사진이, 그리고 그 공간에 있던 남들의 경험이 내심 부러웠다. 속으로 스페인 여행을 꿈꿨다. 결행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면 왜 스페인에 대한 수업을 선택한 걸까. 실은 스페인에 대한 로망이 대학 입학 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더 어렸을 때 무심코 뒤적여본 지도책. 남미 국가들이 모두 스페인어를 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스페인어를 배우면 남미에서도 써먹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남미에 간다는 게, 또 남미 사람을 만나는 게 실현하기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건 몰랐지만... 여튼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을 뿐 마음속엔 '스페인' 세 글자가 아주 오래전부터 박혔다. 그때도 내게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 물었다면 아마 나는 스페인이라 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꽃보다 할배>에서 스페인을 갔을 때 참 많이 아쉬웠다. '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당시 대학생들이 유럽 여행 간다는 게 전혀 생소한 일은 아니었지만, 스페인보다는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가 메인이었던 것 같다. 내 지인만 해도 '스페인은 위험하다'며 코스에서 뺐을 정도였으니. '순전히 주변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스페인은 <꽃할배> 이후 여행지로서 더 많이 각광받은 것 같다. 원치는 않았지만 결국 나도 이번 여행에서 '꽃할배'들이 다녀간 루트를 아주 충실히 따랐던 것 같다.


김이 좀 빠졌다. 모순적인 욕심인데, 쉬이 가보지 못한 '나만의 여행지'를 가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도 안 가는 곳을 여행한다는 건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여행 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삼십대 초반에, 아직 가족을(특히 자녀를)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때, 묵혀뒀던 과거의 '워너비'를 실현하고 싶었다.


2년 전엔가 스페인에 가겠노라 티켓팅까지 마쳐놓고 갑작스런 변심(단순히 변심이라고 하기엔 설명하기 복잡한 상황이었지만)으로 멈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겨울을 스페인 여행 적기로 삼고 지난해부터 때를 기다렸다. 휴가 일정이 겨우 정해지자, 그에 맞춰 당장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티켓을 '질렀다.'


다만, 인천공항에 닿을 때까지, 아무런 계획은 없었다. 그저 2년 전 사둔 여행책자만 의지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20180228_125119.jpg 여행 중 가장 설레는 순간 ⓒ동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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