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가고 태워지는 것들도 작품이 된다

‘소멸의 시학 : 삭는 미술에 대하여’

by 윤승민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2290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ffxNLayOUxxNOIF9iz%2BnFkWJyfU%3D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간담회에서 아사드 라자의 ‘흡수’ 경작자 팀이 흙을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금과 다이아몬드가 비싼 값어치를 인정받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잘 변하지 않는다’는 성질이다. 광물뿐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치는 많은 물건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를 잃는다. 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많은 유물과 미술관에 걸린 많은 미술품도 다르지 않다. 후대의 평가가 바뀌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상태가 얼마나 변하지 않았느냐가 유물이나 미술품의 가치를 좌우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소장·전시품이 갈라지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온도와 습도, 빛의 양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데 주력한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소멸의 시학 :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미술품과 가치,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에 의문을 던진다. 시간에 따라 변질하는 작품도 가치가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썩다, 상하다’ 대신 ‘삭다(Sak-da)’라는 말이 전시 명에 내걸렸다. 김치나 장 같은 발효식품처럼, 시간이 지나 상태가 변하면서 제맛을 찾는 미술품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전시공간 초입부에 깔린 흙이 ‘삭다’라는 말을 곱씹게 한다. 아사드 라자가 기존의 흙에 활성탄, 서울에서 구한 커피 찌꺼기, 택배 상자, 닭 뼈, 은행, 소나무 잎, 이면지, 전선 피복 등을 더해 ‘네오 소일’(neosoil)을 만들었다. 사전에 공모한 경작자들이 전시공간에서 라자의 흙을 도구로 골라내고, 이를 관람객에게 나눠주는 것까지가 그의 작품 ‘흡수’(2026)다. 관람객이 밟을 때마다 소리 없이 푹 파여 발자국을 내는 흙은, 미생물이 서울의 부산물과 상호작용하며 묘한 향을 뿜어낸다. 라자는 “흙은 공동체의 경험이 새겨진 아카이브이자 그 토대”라고 했다. 여러 부산물이 삭으면서 흙이라는 한 물질로 돌아가는 과정, 그 결과물을 여러 사람이 나눠 갖는 행위는 모두 ‘공동성’과도 맞닿아 있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2290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MK9EAGeKtrLSexBk7pLSqbLK3lw%3D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간담회에서 관계자가 작품 ‘분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출신 작가 유코 모리는 과일에 전극을 꽂고 전선을 통해 전등이나 확성기와 연결한 작품 ‘분해’(2025)를 선보이고 있다. 전극은 과일 속 수분을 변화를 측정하고, 전등은 그 측정치에 따라 점멸하며 확성기도 소리를 낸다. 작품의 제목처럼 과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썩어가지만,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빛과 소리를 낸다. 모리의 작품 옆에는 일본 전통 그림 ‘구상도’가 걸려 있다. 시신이 썩어가는 모습을 아홉 단계로 나눠 그린 이 그림은 일본의 옛 스님들이 육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는 수행에 쓰였다고 한다. 죽음이 다른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는 일본 불교의 사상은 모리가 ‘분해’처럼 썩어가는 과일로 작품을 만든 계기가 됐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2290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SG7fvCzOtNH702ZqMI0Dbi2bj1s%3D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간담회에서 관계자가 에드가 칼릴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중미 과테말라의 마야 칵치켈 부족 작가인 에드가 칼렐은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2021·2026년 재제작)에서 크고 작은 서른 개의 돌 위에 과일과 채소를 올려 놓았다. 칵치켈 부족이 조상에게 지내는 제례를 작품으로 재현했다는 것, 돌 위의 과일과 채소도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는 것 외에 독특한 특징이 있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은 2023년 이 작품의 소유자가 아닌 보호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칼렐과 그가 속한 부족의 동의가 있어야 전시할 수 있고, 테이트는 이 작품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보호자’를 자청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혹은 수집가가 미술품의 소유권을 갖고, 시장에서의 수요가 있어야만 미술품의 가치가 가격으로 결정된다는 기존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22907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4PPfT7GCtTHjpT5sodBq499CHT8%3D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에서 전시된 김방주의 ‘벌목과 불’.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방주는 지난해 8~12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렸던 김창열 회고전에 쓰였던 목재를 전시 공간에 쌓아두고 태워 가며 ‘벌목과 불’(2026)을 보인다. 그는 전시회 후 생긴 폐목재를 집에서 땔감으로 써서 생활하고, 남은 재를 다시 전시장 벽면에 다시 바르고 쌓고 있다. 폐목재를 태워 생긴 재는 죽음과 동시에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폐목재는 전시의 흔적이었고, 남은 재는 나무를 태워 언 몸을 녹이고 따뜻한 식사를 해 먹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국내외 작가 15팀이 다양한 작품 50여점으로, 보존되지 않고 삭아가는 미술품을 통해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전시는 5월3일까지. 관람료 2000원.


(2월23일 게재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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