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 우연, 무한 / 2편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을까.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일까.
인식의 한계와 분절화된 언어를 통해 사고할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에, 절대적인 선(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지극히 추상적인 가치를 가시적이거나 감촉이 느껴질 듯한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으로 대체되곤 합니다.
매년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을 설정할 때에 흔히 ‘북극성 지표’를 소환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게 빛나는 북극성(Polaris)-사실 북극성은 그리 밝은 별은 아니지만-이 우리 눈에 고정되어 보이기에, 북극성을 바라보며 항해를 했던 과거의 선구자들처럼, '북극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번 한 해 달성해야 할 종착점-목표점-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북극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구는 팽이처럼 자전축을 중심으로 매일 한 바퀴씩 돕니다. 북극성은 마침 이 자전축을 북쪽으로 길게 연장했을 때 그 끝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북극성 또한 진북(True North)에서 약 0.7도 정도 벗어나 있고, 그래서 24시간 동안 아주 작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원이 너무 작아서 우리 눈에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극성은 인류의 역사라는 짧은 시간 동안은 '가장 믿음직한 길잡이별'로서 고정된 역할을 해주고 있기에, 북극성을 지표 삼아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가치가 알고 보니 상대적인 것이었다면, 그러한 가치를 추구해 온 삶 또한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토어의 말처럼 “상상이나 꿈속 여행이 아니라 현실에서 안전하게 산책하며 돌아다니려면 단단한 기반과 땅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지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짧은 인류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수천년전 누군가도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단조로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추악하다. 영원성의 반영일 때는 가장 아름답고, 변화 없이 이어지는 영속성의 반영일 때는 추악하다. 초월된 시간 혹은 불모가 된 시간.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문학과지성사
Ø(황금비율)은 무리수로서 무한히 이어집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죽을 때까지 Ø의 소수점 이하의 수를 쓰는 일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울해질 뿐.
앞서 말했듯, 인식의 한계, 언어를 통한 사고의 한계는 한편으로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적절히 뭉뚱그려 표현하는 데에 매우 큰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Ø의 소수점 이하 100만 번째 자리는 모르지만, 우리는 Ø가 ‘황 금 비 율’이라는 것은 알고 있고, 이를 통해 황금비율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저처럼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황금비율’을 주제로 글을 쓸 수 있으니, 이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은총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화폐 경제가, 물질성이 있는 주화가 발명된 이후, 즉, 주머니 속에 돈이 있음을 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이후 빠르게 발전했듯이, 인간에게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인가 아닌가는 꽤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손에 쥘 수 없는 무언가를 명확히 이해하려고 하면 금세 답답하고 우울해지기 때문입니다.
궁여지책으로 Ø를 이해하기 위해 Ø의 소수점 이하 숫자들을 쉬지 않고 적고 있는 '시지프스'를 상상하고, 그의 손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Ø를 손에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결국 눈은 손끝에 쥔 연필의 끝을 바라보게 되고, 빠르게 움직이는 연필의 끝은 무한한 움직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무한한 움직임. 얼마나 지루하고 피곤한지 일인지. 게다가 결국엔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라니. 이 얼마나 부질없는 인생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시지프스에게 ‘황 금 비 율’이라는 단어를 알려주고, “앞으로는 ‘Ø'나 ‘황금비율’이라고 적도록 하게나.”라고 말하며 적당히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삶을 생각하면, 이내 처연해지고 맙니다.
무한은 일자一者가 겪는 시험이다. 시간은 영원을 시험하고, 가능성은 필연을 시험하고, 변이는 불변을 시험한다.
학문이나 예술작품, 도덕 혹은 한 영혼의 가치는 각각이 이러한 시험을 얼마나 버티느냐로 가늠된다.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문학과지성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조로움을 버텨내야만 합니다.
버티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지구를 포함한 각각의 행성들이 필연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노동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영원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으로 -결국엔 이 모든 것이 끝나겠지만- 회전 운동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태양계의 어느 하나라도 포기한다면 지금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고, 그 결과는 어둠에 가까울 것입니다.
아니 무(無) 일 것입니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버텨내야 합니다.
어떤 예술가도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예술가로 살지는 않는다.
예술가가 만들어낸 불멸의 걸작 모두는 드물게 찾아오는 짧은 영감의 순간에 생겨난 것이다.
(…)
예술과 삶에서도 그렇듯이, 역사의 장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숭고한 순간이란 드문 법이다.
대개 역사는 수천 년을 잇는 저 거대한 줄을 덤덤하고 우직하게 한 올 한 올 짜나가면서 연대기 기록자처럼 사실에 사실을 나열하곤 한다.
긴장된 순간이 있으려면 항상 준비 기간이 필요하고, 모든 사건에는 전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천재가 하나 나오려면 한 민족 안에서 수많은 범인이 태어나야 하듯이,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 별의 순간*이 오려면 억겁의 시간이 태평히 흘러가게 마련이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 / 슈테판 츠바이크
*'별의 순간'은 독일어 ‘Sternstunde’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미래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 숙명적인 결정이나 행위, 사건을 뜻하는 은유로 쓰이며 흔히 ‘운명적 시간, 결정적 순간’이라는 의미로 번역되곤 합니다.
일이, 삶이, 그리고 나 자체가 예술이 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자신에게는 별의 순간일 것입니다.
별의 순간은
매일 같이 궁리하고, - 필연을 찾기
오랜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반복한 끝에, - 단조로움을 버티기
(행운이 따른다면)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때에, - 별의 순간
그리고, 이 단조로움을 버텨낸다면,
언젠가 우리만의 별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