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 우연, 무한 / 1편
아름다움은 우연과 선이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아름다움은 자체의 고유한 법칙에 부합하면서도 선에 복종하는 필연이다.
과학의 대상. 초감각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아름다움(즉 질서, 비례, 조화).
예술의 대상. 우연과 악의 그물을 통해 지각되는 감각적이고 우발적인 아름다움.
자연 속의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인상과 필연성의 감각이 결합한 상태다. 그래야 하고(최우선이다), 실제로 그렇다.
아름다움은 영혼까지 갈 수 있는 허락을 얻기 위해서 육체를 유혹한다.
아름다음에는 상반되는 것들의 일치, 특히 순간과 영원의 일치가 담겨 있다.
-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문학과지성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하 '브레송')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브레송은 사진을 찍을 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이 앵글로 촬영하였고, - 구도의 발견
이 프레임을 완성할 ‘움직이는 피사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 차분한 기다림
자전거가 지나가는 찰나에 셔터를 눌렀다. - 작품의 완성
아마도 자전거는 빠르게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브레송은 자전거가 자신이 기다렸던 바로 그 지점을 스쳐 지나갈 때 숨을 죽인채 계산된 속도로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셔터스피드를 의도적으로 길게 설정하여 피사체가 흐릿하게 찍히게 하였고, 이로써 고정된 사진에 영원한 운동성을 아로새겼다.
상상이나 꿈속 여행이 아니라 현실에서 안전하게 산책하며 돌아다니려면 단단한 기반과 땅이 필요하다. 또한 여행이 이끄는 방향으로 늘 막히지 않는 순조로운 길이 필요하다.
- 게오르크 칸토어, <초한수 기초이론 기고>, 1887년.
내가 말하는 형태의 아름다움은 동물이나 그림이 아름다운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선반 위에 자와 각도기를 사용해 형태를 완성한 직선, 원, 평면, 입체도형들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나는 이러한 것이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영원토록 완벽하게 아름답다고 단언한다.
- 플라톤, <필레보스 Philebus>, BC 360~347년
<수학과 예술>, 린 갬웰, 쌤앤파커스
황금비율은 선분을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체와 긴 부분의 비율'이 '긴 부분과 짧은 부분의 비율'과 같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 문자 피(Ø)로 표기하며 공식은 다음과 같다.
a + b / a = a / b = Ø ≈ 1.618
또한, 앞의 두 숫자를 더해 다음 숫자를 만드는 피보나치수열(1, 1, 2, 3, 5, 8, 13...)에서 뒤의 숫자를 앞의 숫자로 나누면 그 값은 점차 황금비율에 수렴하게 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이 황금비율이야말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며 예술 작품을 만들어 왔다.
브레송이 의도적으로 황금비율을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이를 포착하려 노력하였으며, 끝내 성공한 것인지 여부는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무례함을 무릅쓰고 나의 주장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브레송은 자신의 의지로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여 황금비율-시몬 베유가 말한 “과학의 대상. 초감각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아름다움(즉 질서, 비례, 조화).”-을 포착하기 위한 완벽한 구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이자, 통제불능의 피사체인 자전거를 탄 사람이 없이는 황금비율이 완성되지 않는다.
만약 사진에 자전거를 탄 사람이 없었다면 그저 훌륭한 사진에 그쳤을 것이다.
사람들이 충분히 오랫동안 그러한 사진 속에 침잠했다면, 여기서 참으로 대립적인 것들이 서로 접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주 정밀한 기술이 그것의 산물들에게, 손으로 그린 그림이 우리에게 결코 줄 수 없는 마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사진사가 제아무리 조작을 잘하고 그의 모델의 자세도 제아무리 미리 계획했다손 치더라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 사진 속에 한 줄기 불꽃같은 우연, 여기와 지금, 현실이 그것을 가지고 이미지적 성격을 마치 완전히 태워버린 것 같은 그런 여기와 지금을 찾고, 오래전에 흘러간 순간의 그와 같은 모습 속에 미래의 것이 오늘날에도 깃들어 있는 장소, 우리가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깃들어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아내고 싶은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사진의 작은 역사>, 발터 벤야민
사진과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지만, 언젠가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사진기라는 기계가 최초로 발명되었을 때에는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 이 새로운 문제적 기계에 인간의 창작 의지가 승차하면서 점차 회화에 도전하는 예술로서 자리매김하려고 했을 것이다.
새로운 매체, 도구, 기기 등에 기반하여 새로운 예술이 되고자 하는 무언가는 기성의 예술과는 다른 자신만의 특이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부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은 회화에 도전하는 도전자였다.
회화에는 없고 사진에만 있는 것은, ‘우연’ -통제되지 않는 피사체, 바람 등-이다.
(이성에 대한 신뢰가 바벨탑 꼭대기로 향할 즈음, 1800년 대에 카메라는 탄생했고, 카메라는 이성의 통제 밖에 있는 우연성을 끌어안기로 결심한 매체였으며, 그 이후 이성에 대한 신뢰를 처참하게 배신하는 일련의 세계사적 사건이 발발했음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사진기의 발명 시점과 사진이라는 수단이 예술로 편입하는 시점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지금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상상을 해본다.)
결국 개인의 이성과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타인으로 대표되는) 우발, 우연성, 통제불능의 무언가를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사진이 예술의 지위를 얻게 되었듯, 일과 삶 또한 사진을 닮아 (특정한 조건이 성취된다면) 예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가톨릭 신학자와 철학자는 유대-기독교의 하느님과 세계를 뒤덮은 보편적인 현실을 가리켜 ‘절대자’라고 불렀다. 절대자라는 이름은 신과 존재의 근원이 상대적,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절대자’와 ‘무한'이라는 용어는 신과 존재의 근원이 모두 무한한 특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연관을 지었다.
니콜라우스는 실무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기반으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절대최대에 관한 본질적 무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떠나는 영적 여행을 설명하며, 인간은 지구에 거하는 유한한 시간 동안 언젠가는 죽는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무한성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한다고 주장했다(<박학한 무지 De Docta Ignorantia>, 1440년)
이상 <수학과 예술>, 린 갬웰, 쌤앤파커스
1.6180339887 …
Ø는 규칙성 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무리수다. 지극히 추상적인 숫자를 이해하는 데에는 적절한 타협이 필요하다. 무리수라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여러 방면으로 유한한 인간이기에, 온전한 이해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체적인 숫자를 떠올리게 된다.
숫자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양태-운동-로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추상’이 ‘구체’가 된다(물론 ‘구체’를 얻은 대신, 논리는 잃겠지만. 그렇게 유혹에 굴복한 것이겠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가 지나가는 찰나(라고 표기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 예를 들면 1/60초)를 포착(했다고 착각)하는 행위는, 무한한 움직임을 인간의 인식적 한계 내에서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일지 모른다.
황금비율이라는 초감각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아름다움.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을 개인의 삶.
이 상반된 것들이 특정한 순간에 ‘찰칵’ 소리를 내며 필름에 아로새겨질 때, 순간과 영원이 일치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니, 이를 두고 어찌 예술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1부 끝.
사진들 출처
-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44586
참고한 책들
<수학과 예술>, 린 갬웰, 쌤앤파커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도서출판 길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문학과지성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하영북스
<황금비>, 개리 B. 마이스너, 시그마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