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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오브피스 Feb 26. 2023

AI가 쓴 책을 읽어보았는데 의외였다.


며칠 전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스노우폭스북스라는 출판사에서 발간된 작품인데, 저자가 ChatGPT인 것이 특징이다. 기획과 편집은 사람이 했다. 'AI 저자와 인간 기획자가 7일 만에 만든 책'이라며 뉴스에 여러 번 소개됐다. 궁금해서 책을 바로 주문했고,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읽고 난 후 든 감상은 '좀 의외네?'였다.


이 책은 의외로 멀쩡하다. AI가 생성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괜찮은 조언들이 많다. (예: "지불해야 할 대가는 치러야 한다")

이 책은 한국어로 되어있다. 다만 ChatGPT는 영어 중심이기 때문에, 먼저 영어로 텍스트를 생성한 후 파파고로 번역하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번역 퀄리티가 의외로 괜찮았다. (책에 영어 원문도 포함되어 있음)

각 장을 넘어갈 때마다 삽화가 있는데, 삽화도 AI로 만들어졌다. 내용과 그럭저럭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없고 돈이 아까운 책이었다!


내가 이 책을 산 것은 한 가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AI가 쓴 책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기대감이 너무 컸는지, 사실 별로 대단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일단 단조로운 문장 구조가 반복되어 지루했다. "~해야 한다" "~하라" 같은 문장이 줄줄이 이어진다. 영감을 준다기보다는 (예시나 근거가 없어) 잔소리를 늘어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재치 있는 비유를 하거나, 역으로 질문을 하거나, 반전을 주는 개성도 거의 없었다. 좋은 말이 잔뜩 쓰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와닿지 않았다.


'글을 누가 썼는지'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읽는 내내 무의식적으로 저자의 얼굴을 떠올리려다가 '아 맞다 AI였지'라고 단념하는 것이 반복됐다. 같은 이야기라도 전달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인데, AI가 전달자이니 그야말로 무색무취였다. 책 제목이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이면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나누며 '어떻게 그 방법을 찾아냈는지'에 대한 스토리가 있을 법한데, 그게 없으니 호소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내용이 아쉬웠다는 것이지, 책의 형태는 잘 갖춰져 있었다. 따라서 인간 작가가 ChatGPT를 도구로 사용해 집필 과정을 개선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본다. 특히 오탈자 찾기, 반복되는 표현 찾기, 샘플 텍스트 넣기, 챕터 제목 붙이기, 분량 줄이기 등 AI로 효율화할 수 있는 부분은 다양할 것 같다. 대신 어디까지나 저자가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


물론 '어디까지 손을 대야 인간이 쓴 것이라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글을 직접 손으로 쓰지 않고 컴퓨터 키보드로 쓰다니! 그건 글을 썼다고 할 수 없어'라는 논쟁도 과거에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포토샵으로 그린 건 진정한 그림이 아니야!'라는 호통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정의는 별로 의미 없다고 본다. 읽고 감상하는 입장에서 인간의 호소력이 느껴지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을 읽고 나서는 책값(17,000 원)이 아까웠는데, 인세 수익은 모두 튀르키예 지진피해 성금으로 사용된다고 하니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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