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마케터 취업 사기 당한 거죠?'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마케터 취업의 고난과 역경

by 마농

나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 연계 프로그램으로 마케팅 일을 처음 시작했다.

인턴에서 정규직이 되었고, 그 후로 몇 번의 이직을 했다.

내가 있는 지역에는 마케팅 포지션의 일자리가 많지 않았고, 상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는 프리랜서가 되기로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던 찰나, 우연히 알게 된 한 대표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장 수입이 없던 나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제가 앞으로 로컬을 살리는 마케팅, 소상공인을 돕는 마케팅, 마케터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려고 해요. 여기에 관심 있을 텐데 함께해요."


지금까지 제품/서비스에 대한 나의 관심을 기준으로 회사를 골라왔던 나는 3년 차 마케터였음에도 최저 시급에 맞춰 급여를 줄 수 없다는 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직원으로 입사한 것이 아닌, 계약직 프리랜서 형식으로 근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예 수입이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 일단 해보자.


그렇게 일한 지 한 두 달이 지났고

대표는 내가 만들어낸 모든 결과물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나는 점점 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내가 했던 업무를 돌이켜보면 처음에 말했던 로컬을 살리는 마케팅, 소상공인을 돕는 마케팅, 마케터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없었다.


나와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같은 대표 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동료한테 말했다.

"00님, 이 정도면 저 마케터 취업 사기 당한 거 맞죠?"


이 말을 꺼낸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건 1. "강의 PPT랑 제 화면이 다른데요?"

스마트스토어 강의에 보조 강사처럼 따라갔던 날이 있다.

꽤 큰 기업에서 소상공인들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스마트스토어 강의였다.


소상공인을 돕는 건 로컬 마케팅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보조 강사로 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예스"를 했다.


그날은 꽃집, 정육점, 공방, 과일가게 등 오랜 시간 오프라인에 매장을 운영하셨고, 온라인 판매에도 도전해보고 싶으신 40대 후반 이후의 사장님들 20명 정도가 오셨다.


대표는 강단에서 강의 자료를 보여주며 수강생들에게 현장에 준비된 노트북으로 스마트스토어를 개설하라고 시켰다.

보조 강사인 나는 수강생이 손을 들면 옆에 가서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저도 안 되는데요?", "이다음에 어떻게 해요?"

내 몸은 하나인데 수강생 90% 이상이 손을 들면서 질문한다.

강의 자료는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PPT의 캡처 화면은 수강생들이 보면 화면과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강의 자료 업데이트를 이렇게나 안 하다니...

얼레벌레 2시간 넘는 강의를 통해 사장님들은 덜렁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만 가입하고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누구를 위한 강의를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얻은 인사이트

- 강의를 할 때는 수강생이 어떤 걸 얻게 될지 명확히 알려주고, 준비물을 알려줘야 한다.

(스마트스토어 만들려면 네이버 아이디가 필수인데, 사전 공지가 없었기에 아이디를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 강의하기 전에 강의 자료가 충분히 최신화되어있는지 확인은 필수다.

(수강생에게 혼란을 주고, 신뢰성과 전문성이 확 떨어져 보인다.)


사건 2. "대리님, 원래 마케터가 이런 일 해요?"

대표는 대기업 출신 마케터를 메인 키워드로 대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지방에서는 마케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고, 관련된 오프라인 활동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은 어린양들이 관심을 가졌다.

근처 대학과 연계해서 인턴십 프로그램 형태로 대학생을 방학 동안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지원자가 있었고, 두 번의 면접을 거쳐서 대학생 몇 명을 인턴을 뽑았다.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에서 근무했던 나는 1인 마케터로 후임이 있던 경우가 없었고, 마케팅 관련 대외활동, 인턴십을 통해 마케터에 첫 발을 내디뎠던 만큼 대학생들을 보니 예전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대표는 나에게 학생들에게 줄 업무를 주고, 내가 그 업무를 각자의 속도에 따라 학생들에게 할당했다.

그리고 나에게 '너무 편하게 해주지 말 것, 업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별 생각이 없는 나는 '네, 알겠습니다.'하고 넘겼다.


블로그 계정 1개, 인스타그램 계정 1개를 학생들이 맡아서 게시물을 업로드하는 거였다.

출근 첫날, 학생들에게 가이드라고 준 것에는 대충 이런 내용이 있었다.

1. 네이버 블로그, 1500자 이상 작성, 이미지 20장 이상 첨부

2. 인스타그램 좋아요 하루에 15개 이상 누르기, 나를 맞팔해줄 계정 찾아서 팔로우하기


한 명이 하루에 블로그 3개씩 쓰게 시켰고, 캡컷으로 찍어낸 릴스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미 SNS에 익숙한 대학생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나와 대학생들만 점심을 같이 먹던 어느 날, 학생들이 물었다.

"대리님, 원래 마케터가 이런 일만 하는 거예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나한테 별 얘기하지 말라고 했던 걸까...'

"회사마다, 업무마다 다르긴 하죠. 콘텐츠 만드는 경우도 있고, 전략 짜는 경우도 있고......"

바보 같이 그냥 말 끝을 얼버무리고 끝냈다.


사무실로 돌아와 키보드를 치면서도 굉장히 찜찜했다.


그 속에서 얻은 인사이트

- 누군가에게 업무를 줄 때는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한다.
(학생들에게 시킨 업무는 마케터의 여러 업무 중 학생들이 활용하기 쉬운 업무였다고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 상대방의 실력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

(학생 중 대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팔로워 1만이 넘는 친구가 있었고, 맞팔 작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 3. "이 자료 2개 중에 쓸 만한 거 뽑아서 넣어주세요."

강의를 자주 다니는 대표는 강의 자료, PPT 등 여러 문서를 만드는 일을 시켰다.

목차를 주고 내용을 내가 채우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내가 강사인가 싶기도 했지만, 긍정 회로를 돌리며 '이런 교육 자료도 여러 번 만들어보면 언젠가 나도 써먹을 날이 있겠지'라며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한 날은 대표가 메일로 전자책 파일 2개와 워드 파일 1개를 보내주며, 전자책에 있는 내용 중 몇 가지 부분을 골라서 워드 파일에 추가해 달라고 했다.

전자책 파일은 다른 강사가 쓴 것으로 온라인에서 판매 중인 것이고, 워드 파일 1개는 본인이 전자책으로 만드려고 여기저기서 짜깁기 한 내용이었다.

이 업무를 아무렇지 않게 시키는 걸 보고 그냥 어이가 없었다.


물론 세상에 완벽히 새로운 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평범한 2가지를 믹스해서 새로운 걸 만든다던가, 레퍼런스를 보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던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게 생겨나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공들여서 작성한 것을 베끼는 것은 명백한 저작권 침해며, 벤치마킹이나 레퍼런스로 쓴 거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속에서 얻은 인사이트

- 내 저작물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저작물도 소중하다.

(참고와 도용/침해를 구분해야 한다.)

- 돈에 눈이 멀었어도 '해도 될 일'/'하면 안 될 일'을 구분해야 한다.

(돈을 벌더라도 정직한 방법을 통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야 한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둔다고 하면 책임감 없어 보일까 봐, 수입이 0원이 될까 봐 주저했다.

하지만 진짜 이 사람이랑 더 일하면 안 좋은 꼴만 보게 될 것이 뻔하며, 나도 계속 이대로 일하면 무뎌질 것 같았다.


"대표님, 조금 갑작스러울 수 있으실 텐데 제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더는 함께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는 사직서를 전달했다.

대표는 사무실 출근 대신 100% 재택근무로 전환해 주겠다 제안을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 후로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 했던 일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욕심이 많고, 성취 지향적인 나는 대학, 스펙, 자격증, 월 1000, N잡, 경제적 자유, 디지털 노마드 등에 무언가에 휩쓸려서 20대에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해왔다.


하지만 스스로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뒤돌아보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만 보고 달려갔다.

나도 더 잘해야지, 더 많이 벌어야지, 더 열심히 해야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도'라는 건 항상 누군가와 스스로를 비교하고 있다는 말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내 의도와 다르게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의 취향, 행동 등 여러 점들이 모여서 하나의 선을 그려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봤다.

나는 점만 수없이 찍고, 내가 찍은 점들을 선으로 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록을 통해 내가 찍었던 점을 이어가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알아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았던 점을 정리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