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가는 길

1. 강경이 어디야?

by 유영준

충남 논산하면 많은 사람들이 육군 훈련소로 기억하곤 한다. 더러는 딸기나 고구마같은 지역 특산품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논산 딸기나 상월 고구마와 비교도 안될만한 지역 상품이 있으니 강경 젓갈이다. 강경 젓갈은 맛이 좋아 '맛깔젓'이란 이름까지 붙었다.


그런데 내륙인 논산에 웬 젓갈일까, 젓갈이 유명한 다른 지역인 광천(홍성)이나 곰소(부안)야 바다를 끼고 있는 데다가 곰소는 염전까지 있어 자연스레 젓갈이 유명한 이유가 설명이 되지만 젓갈의 최대 명산지인 논산 강경읍은 왜일까.


강경은 지금 8천명도 안되는 인구가 거주하지만 전성기에는 3만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다. 그 시절이 백년 전이니 그 위세를 알만하다. 강경이 이렇게 융성했던 이유는 당시의 유통체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당시는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해 수운이 크게 번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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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나오는 것처럼 강경(노란 네모)은 이런 환경 속에서 최적의 위치였다. 전라도 진안에서 발원해 충남을 휘돌아 다시 전라도 군산으로 빠져나가는 금강 줄기는 한마리 용처럼 전북과 충남 일원의 가장 중요한 수원 중 하나였다. 특히 475년 이후 열렸던 웅진(공주), 사비(부여) 시대는 금강 수운을 발전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특히 금강 수로는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 논산평야가 가까워 자연스레 중요한 수운으로 자리잡았다.


이때 자연스레 성장한 것이 바로 강경이다. 1990년 군산에 금강하굿둑이 완공되기 전까지 강경까지 배가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조선 후기 강경은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이 되었다. 이후 1900년대 일본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강경에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19010년, 한일은행 건물이 지어진 것을 시작으로 충남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이 강경이다.


이렇게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한 강경은 이후 선진문물의 진입창구가 되었다.1845년 중국에서 사제로서 서품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가 처음 익산시 망성면에 위치한 나바위에 땅을 디뎠다. 익산시 망성명은 강경의 바로 아랫강물인데 실제 김대건 신부가 최초 사목을 했던 곳에 성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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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침례회, 성결회, 감리회, 장로교 등 다양한 개신교 종파의 유서깊은 교회들이 자리잡아있다. 그래서인지 강경에 처음 오는 사람은 작은 동네에 왜 교회들은 다 크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강경은 이러한 기독교 종교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만큼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는 허브가 되었다. 강경이 지금의 강경읍이 된 것은 꼭 111년전이다. 바로 일제시대때이다.


1914년, 일제는 자신들에게 조선의 행정 체계를 본격적으로 교체한다. 이른바 군면대폐합이다. 당시 지금의 논산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는 송시열의 본향이자 강경이 포함된 은진군(논산 은진면)이었다. 이 은진현을 중심으로 노성현, 연산현, 석성현이 합쳐지게 되었다. 재밌게도 당시 논산이라는 지명은 은진군 화지산면 논산리라는 그저 작은 마을 이름이었다. 그러던 것이 각각 은진 송씨와 파평 윤씨 등 지방 유림의 힘이 거세던 은진과 노성 등의 불만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이 논산이 새로운 지역 이름으로 확정되게 되고 화지산면에 혼마치가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행정적인 편의로 억지로 지방의 위세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논산 시내가 혼마치가 들어섰음에도 읍으로 승격된 것이 1938년인데 강경은 그 이전인 1931년에 이미 읍으로 승격되었다. 특히 강경이 승격되었던 1931년은 읍 제도가 시행된 첫 해였다. 그 당시 강경과 함꼐 승격된 읍은 동래군 동래읍(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대전군 대전읍(지금의 대전광역시), 경기 시흥군 영등포읍(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전남 광주군 광주읍(지금의 광주광역시), 전북 전주군 전주읍(지금의 전주시), 공주군 조치원읍(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등이니 강경의 위세를 알만하다. 이렇듯 강경은 논산 일대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지금까지도 논산경찰서와 법원, 검찰지청 등이 강경에 있는 것이 그때의 작은 흔적이라면 흔적이다.


그러나 강경의 영화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인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며 목포에서 서울로 화물이 운송되기 시작한다. 철도가 지나는 조그만한 동네인 대전이 갑자기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수운의 메리트가 없어지며 청주와 공주가 강경상권에서 이탈한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시기까진 일본의 강제 미곡수탈로 인해 호남평야와 가까운 강경이 아직까진 번영의 생명줄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부산이 더욱 중요해지며 주 개발정책에서 비껴나있었던 강경은 자연스레 몰락하고 위에서 언급했듯 1990년 금강하굿둑이 완공되자 뱃길마저 끊어지며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이것이 강경의 어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