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항구

심포항 나들이

by 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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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내내 비가 내리다가 8일날에야 해가 떴다. 해가 뜬 김에 부모님과 함께 길을 나서 전주본가 주변을 돌았다. 마이산에 갔다가 김제 벽골제 지평선 축제 개막에 가볼 참이었다.


마이산은 초등학생때 소풍을 온 이후로는 참 오랜만이다. 탑사를 가지는 않았지만 근처 생태수변공원이 잘가꿔져 있었다. 마이산이 있는 진안은 전라북도의 동쪽, 김제는 서쪽이다.


진안에서 김제를 지나가며 새삼 작은 전라북도가 모든걸 담았다고 생각이 든다.

흔히 무진장이라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는 동부산간 지대로 지대가 높다. 개마고원만 하겠냐만은 전라도 땅에서는 험준한 편이다.


마이산에서 부귀면을 지나는 길은 온통 산 위의 길이라 차를 달리면 귀가 막혔다 뚫렸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완주 소양의 웅치터널을 지난다. 임진왜란 시기 이치와 함께 호남을 방어한 전적지다.


산길 속 도로를 지나 어느덧 완주 구이면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산들이 낮아진다. 여기서 완주와 전주, 김제 이서까지는 야트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분지를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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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어느새 산이 사라진다. 김제다. 들판엔 벼대신 콩이 심어져있다. 쌀 수매문제때문이곘지.

그런데 축제장 3km 전부터 차들이 줄지어 섰다. 30분을 기다려도 꿈쩍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셨다.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지만 줄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심포항으로 가시죠."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예전에 가본 적 있는 곳. 하지만 그 '예전'이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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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황금빛 김제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는 길에 김제 메타세콰이아길 양옆으로 코스모스가 흐드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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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해본다. 벽골제는 330년에 물을 가두기 위해 만든 저수지다. 하지만 지금은 말라 있다. 반면 내가 가는 심포항은 수천 년 흘렀던 바다가 방조제에 갇혀 호수가 된 곳이다. 물을 담으려던 곳은 비었고, 흐르던 것은 갇혔다. 1700년의 시차를 두고 물의 운명이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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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항. '깊은 포구'라는 뜻이다. 호남평의 두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곳. 그래서 조수 간만의 차가 컸고 강에서 실려온 유기물이 풍부해 조개가 잘잡혔다.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드러났고, 밀물 때면 배들이 항구 깊숙이 들어왔다. 조개를 싣고, 고기를 싣고, 사람들을 싣고.


한때 이곳은 전국 백합 생산의 60%를 차지하던 어항이었다. 조개를 실은 배가 매일 드나들었고, 항구 주변에는 조개구이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조개 굽는 냄새가 진동했던 곳.


그런데 새만금 방조제가 바다를 막았다. 33km의 거대한 제방. 세계 최장의 방조제. 그것이 바다를 가로막자 모든 게 변했다. 바다는 호수가 되었고, 조수 간만은 사라졌고, 어선은 줄었고, 조개구이집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심포항 주차장. 시계를 보니 5시 50분. 서둘러 항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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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보다 깔끔해져 있었다. 산책로가 정비되었고 물결무늬 난간이 설치되었다. 폐업한 조개구이집들이 있던 자리는 해변공원이 되었다. 하지만 본질은 같았다. 넓은 수면, 조용한 항구, 몇 척의 빈배.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계단 아래의 비린내를 맡으며 그 곳으로 향한다.

파도 없는 고요한 물이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13년 전 그 계단. 하지만 이번엔 부모님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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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군산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빈 하늘을 사정없이 가르며 지난다. 머리를 들어본 하늘은 아찔하다. 해는 이미 언제 떨어진지 기약이 없었다. 6시가 좀 넘었을까. 2분여 만에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황금빛 길도, 붉게 타오르는 하늘의 절정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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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네. 조금만 일찍 올 걸."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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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몰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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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졌지만 잔광이 남았다. 하늘은 여전히 붉었다.

저 멀리 방조제 위로 우아한 곡선이 보였다. 새만금 남북도로를 가로지르는 만경대교다. 세계최초의 비대칭 리버스 아치교라고 한다. 활을 뒤집어놓은 초승달 같은 형태. 군산공항을 오가는 항공기들의 안전을 위해 창의적인 비대칭 구조를 채택했다.


역광을 받아 검은 실루엣이 된 다리는 형태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새만금의 물길을 품은 듯한 그 곡선. 마치 새만금의 풍요를 두 손 모아 제물로 떠받치는 듯 웅장하다.


다리 너머로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겹겹이 보였다.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익숙한 섬들이다.

KakaoTalk_20251014_072738516_01.jpg 당시 근무하던 부대. 부대가 이전하며 이제 군산시 소유의 빈 부대로 남았다. 간혹 드라마 등을 촬영한다.

10년 전, 나는 비응도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저 섬들을 오가며 작전을 펼쳤고, 매일 서해의 석양을 봤다. 그것만으로도 군생활이 행복했다. 해가 질 때마다 바다엔 물길을 따라 황금빛 길이 놓였다. 태양에서 나를 향해 쭉 뻗은 빛의 길. 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반짝반짝. 마치 누군가 물 위에 금가루를 뿌린 것 같았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태양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 위를 걷는 기적. 빛의 길. 황금빛 다리.


바다를 바라보며 탄약고를 지키던 그 날.

그때는 '언제 제대하지?' 그것만 생각했다. 복무 일수를 세고, 전역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힘들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가 그립다. 젊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 순간엔 견디기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름답다.


그보다 몇년 전에는 다른 사람과 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당시 만나던 아이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석양을 봤다. 그 아이가 말했다. "나중에 결혼하면 이런 데 살까?" 나는 별 생각없이 그러자고 대답했었다.

그 뒤로 그 아이와 이 곳에 다시 온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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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해였던 물에 부서지는 노을. 나도 모르게 눈을 계속 빼앗겼다.

사실 서해가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단 해가 지는 서쪽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맑은 물은 빛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하지만 탁한 물 속 무수한 입자들은 햇빛을 산란시킨다.

그래서 이런 붉은 노을이 더 깊다.


서해가 탁한 것은 수천 년 동안 강에서 흘러온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흙, 퇴적물, 생명들의 흔적. 그것이 석양을 만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피어난다.

6시 20분. 벌써 어두워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13년도 그렇게 빨리 흘렀다.


돌아오는 길, 김제평야를 가로지르는 어두운 도로. 지평선 너머 저문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저게 달이야?"


어머니가 놀라셨다.


추석 보름달이었다. 거대했다. 태양이라 착각할만 했다. 아니, 더 커 보였다.


보통 우리가 보는 달은 산 위로 뜬다. 산마루를 넘어 높이 떠오른 달은 작아 보인다. 하지만 김제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이 없다. 달이 땅에서 바로 솟아오른다. 원근감의 착시로 엄청나게 크게 보인다.


"평생 이런 달은 처음 보네."


아버지가 감탄하셨다.


달빛이 들판 위로 쏟아졌다. 창문을 열었다. 은빛 달빛과 가을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별이 안 보이네?"


"달이 너무 밝아서요. 별은 거기 있는데 가려진 거예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마음속에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

.

벽골제와 심포항. 물을 가두려 했던 곳은 말랐고, 흐르던 바다는 갇혔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13년 전과 지금. 다른 형태지만 여전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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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형태를 바꾼다. 바다에서 호수로, 강에서 저수지로. 형태는 바뀌지만 여전히 물이다.

우리 삶도 그렇다.


내년이면 근처에 국립새만금수목원이 문을 연다고 한다.

151ha 규모의 해안형 수목원. 심포항은 또 변할 것이다.


다음엔 일찍 가야겠다. 온전히 보지 못한 그 석양을. 황금빛 길도, 붉은 하늘의 절정도, 잔광도.


서해의 석양은 13년 전에도 아름다웠고, 지금도 아름다웠다. 13년 후에도 아름다울 것이다.


지평선에서 떠오른 거대한 달. 달빛에 감춰진 별들. 그것들을 친구 삼아 나는 돌아왔다.


물처럼 흐르며 살아가리라. 형태를 바꾸되, 여전히 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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