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역사의 그림자
근대문화거리의 정제된 풍경을 뒤로하고, 태평리로 향하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반듯하게 복원된 거리와는 달리 이곳은 강경 사람들의 진짜 삶이 숨 쉬는 곳이다. 복개교를 건너니 황산초등학교가 제법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법한 평범한 학교 풍경이다.
그런데 여기서 1분만 걸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소쿠리전이라 불리는 홍등가다. 시장근처니 예전에 소쿠리를 팔던 곳일까? 그 입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감리교회와 노인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신성함과 세속, 기도와 욕망이 한 골목 안에서 공존하는 풍경이 강경의 복잡한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단순히 마을 어귀에, 그리고 초등학교 주변에 홍등가가 있어서 불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이제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강경의 마지막 이야기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몇 남지 않은 가게와 그곳에 남아있는 여성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먼 옛날 언제 흘러들었는지도 모를 기억을 남긴 채, 이들은 여기서 살고 있다. 길고양이를 가엾게 여겨 그들의 밥을 챙겨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가끔 지나다니는 외지인들을 보며 세상을 바라본다. 시골 한 귀퉁이의 이야기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살아온 세계가 가장 큰 곳이다. 그걸 억지로 없애거나 욕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한낮의 소쿠리전은 그냥 시골 골목길이다. 밤에는 어떤지 보지 못해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않겠는가.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삶의 무게들이 이 좁은 골목 안에도 켜켜이 쌓여있다.
고수부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걷다 보니 젓갈백화점과 음식점들이 즐비한 골목이 나타난다. 우어(웅어의 이지역 방언)철이 한참은 지났는데 거리 가득 우어회를 개시했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마침 점심을 막 지나는 시간,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몇몇 식당에선 서른은 됨직한 사람이 나온다. 강경 젓갈의 명성은 여전한 모양이다. 조선시대 3대 포구였던 강경은 젓갈의 명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강경 상권이 전주와 청주까지 뻗쳐있었기에 몰려오는 수산물을 그곳까지 보내려면 소금에 절일 수 밖에 없었을테니 자연스레 젓갈이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소금이 나는 광천과 곰소와 다른 강경만의 다른 점이다. 다른 곳은 소금이 좋아 젓갈이 생겼는데 강경은 생선이 모여 젓갈이 났다.
영화는 간 데 없다만 젓갈을 담구던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식당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구수한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 골목의 생명력을 증명한다.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큰 배 모양을 한 강경젓갈전시관이다. 마치 금강을 항해하던 옛 상선을 그대로 육지로 옮겨놓은 듯한 독특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배의 선체를 따라 걸으며 상상해본다. 이런 현대식 배는 아니었겠지만 배들이 금강을 가득 채우며 오갔을 그 시절을 말이다.
전시관을 지나 황산근린공원으로 들어선다. 지역 청년들이 정성스럽게 가꾼 이 공원 한편에 박범신 작가의 문학비가 서 있다. "작가 박범신 선생은 한국문학계의 자랑이요 우리 고장의 긍지이다"라는 비문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박범신의 소설 『소금』. 바로 이 강경을 배경으로 한 그 작품 속에는 이 땅의 모든 맛이 녹아있다. 소금이 짜기만 한 게 아니듯, 삶도 한 가지 맛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쓰고, 달고, 짜고, 시고, 매운 온갖 맛들이 뒤섞여 비로소 삶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문학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이제 전망대로 오르기 위해 뒤편의 데크로 향한다.
데크는 생각보다 가파르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밟으며 올라간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곳곳이 낡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진솔하다. 5분여를 오르자 시야가 확 트인다.
돌산전망대는 벼랑 위의 등대처럼 아찔하게 솟아있다. 그 끝에 서서 내려다본 금강은 숨을 멎게 한다. 강이 누런 뱀처럼, 아니 거대한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흘러간다. 간밤에 내린 비로 황톳물이 쓸려 내려와 물빛이 더욱 탁하고 진하다. 맑은 날의 푸른 강물도 아름답겠지만, 이렇게 흙빛으로 물든 강은 더욱 원시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이다.
이 전망대에서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천삼백여 년 전 그날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향해 진격하던 바로 그때 말이다.
기벌포, 지금의 서천 장항 앞바다.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나라 군대는 갯벌 위에 갈대와 짚을 깔아 상륙로를 만들었다. 백제군의 저항을 가볍게 걷어내고 승리한 당군은 다시 배에 올라탔다. 그들이 탄 1,400척의 전함은 바로 이 금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다.
강 저편이 바로 부여의 세도면이다. 강은 굽이치고 또 굽이친다. 상류를 따라 올라가면 백제의 석성산성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흐르고 흘러 백마강에 이르러 부여 현북리 북쪽,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이 웅크리고 있다.
무왕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세운 왕흥사 맞은편, 구드래나루에 1,400척의 당나라 전함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백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늘을 뒤덮을 듯한 돛들, 물살을 가르는 노 소리,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이 평화로운 강마을을 공포로 물들였을 것이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과연 낙화암에서 떨어진 꽃다운 청춘이 정말 한 명도 없었을까. 부여 군수리에 있던 옛 군수창고에서는 그때 타다 말아 탄화되어버린 쌀들이 발굴되었다. 귀한 보물인 금동대향로는 누군가 급히 숨기느라 진흙 속에 처박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군량미들은 쓰이지도 못하고 타다 말아 땅속에 묻혔다. 소정방이 자신의 전공을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아직도 불에 그을린 흔적이 가득하다.
사비성에서 꿈틀거렸던 성왕의 찬란한 꿈은 어쩌면 자신의 죽음으로 비극을 예언했을지도 모른다. 한강에서 쫓긴 뒤 비로소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했던 아버지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의 원대한 포부가, 120여 년 후 의자왕에 이르러 핏빛 강물로 바뀌었다. 나라가 무너지는 비극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을까.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울 때, 사비성 앞에서는 1만 명의 백제군이 전사했다. 우리는 5천 결사대의 이야기는 기억하지만, 그보다 두 배나 많은 1만 전사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심지어 그들을 이끈 장군이 누구였는지조차 모른다. 전설에서는 의직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백제를 지키던 용을 낚았다던 조룡대 설화는 결코 1만 백제군이 쉽게 물러나지 않았음을 암시케 한다.
한없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이 평화의 강물이, 한때는 백제 칠백 년 종사의 마지막 핏물이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처럼, 강경은 이렇게 쓰고 달고 짜고 시고 매운, 그런 고장인가 보다. 조선시대 3대 포구로 번성하며 온갖 물산이 모여들던 풍요의 땅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백제 멸망이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역사의 그림자'라는 말이 그야말로 강경의 이름이다.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속에는 빈곤이, 평화로운 풍경 아래에는 전쟁의 상흔이, 아름다운 강물 밑에는 무수한 죽음의 기억이 깔려 있다. 풍요 속의 빈곤. 바로 이 역설이 강경을 강경답게 만드는 것이리라.
돌산전망대를 내려와 다시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의 종착지는 소금문학관이다. 강경산, 즉 옥녀봉 바로 아래에 자리한 그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멀리 옥녀봉이 보인다. 그리 높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지만, 이곳에도 켜켜이 역사가 쌓여있다. 옥녀봉 기슭에는 소설 『소금』의 무대가 된 주인공의 집, 이른바 '소금집'이 자리 잡고 있다. 박범신 작가가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바로 그 공간이다.
옥녀봉 정상에는 큰 나무가 서있고 그 옆으로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다. 전라도 익산의 용안 광두원산에서 올라온 봉화가 처음으로 충청도 땅에서 불을 올리는 곳이 바로 이 강경 옥녀봉이었다. 여기서 받은 봉수는 황화산성과 노성으로 전달되었고, 노성에서는 다시 공주 월성으로 이어졌다.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서울을 잇는 통신망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셈이다.
옥녀봉 아래 바위에는 특별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해조문海潮文이다. 1860년대에 만조와 수심의 높낮이를 기록한 것으로, 지금은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을 오가던 배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정보였을 것이다. 물때를 읽지 못하면 배를 댈 수도, 출항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소금집에서 조금 걸어가니 옥녀봉 구멍가게가 나타난다. 60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작은 가게다.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박한 간판과 낡은 문짝이 오히려 정겹다. 이런 가게 하나가 동네의 역사를 증언하는 산증인이 되는 것이다.
구멍가게를 지나니 공원의 잔디가 널찍하게 펼쳐진다. 공원 한편에는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기념하는 장소가 있다. 당시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 ㄱ자 형태로 지었다는 그 특별한 교회를 기억하는 표지석이다. 강경이 한국 기독교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이 옥녀봉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옥황상제의 딸이 선녀들과 함께 이곳에서 목욕을 하다가, 하늘이 열리는 시간에 늦고 말았다. 급하게 올라가느라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해 가슴을 드러낸 채 하늘로 올라간 그녀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샀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옥녀는 날마다 산에 올라 기도를 하며 용서를 빌었지만, 끝내 하늘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땅에서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천상에서 추방당한 옥녀의 한이 서려있는 산. 그래서 옥녀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전설을 되새기며 산 위로 시선을 돌린다.
저 아래로 쇠락한 강경이 보인다. 쇠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도시. 수많은 역사의 풍파를 견뎌온 이 강경 말이다. 옥녀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머물렀듯, 강경도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이곳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봉화대를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내려오니 얼핏 큰 배처럼 보이는 강경산 소금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 멀리에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라파엘호를 본떠 만든 모형이 땅 위에 서 있다. 천주교와 문학, 두 개의 배가 강경을 바라보며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강경이 낳은 소설가 박범신. 그를 기념하는 소금문학관과 소금문학비가 강경 고수부지의 양 끝에 자리하고 있으니, 박범신 작가가 강경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만하다. 한 작가가 고향에 이토록 깊이 뿌리내리고, 고향이 또 그 작가를 이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아름답다. 찾아온 이 날도 박범신 작가를 기념하는 문학제와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강경산 소금문학관은 박범신 문학만을 다루는 곳이 아니다. 지역 예술가들의 개인전을 여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인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패널에 새겨진 문구가 가슴을 친다. "달고 시고 쓰고 짜다. 인생의 맛이 그런 거지." 소설 『소금』의 대사다. 이 한 문장이 마음 한편을 무겁고 설레게 한다. 강경에서 하루 종일 걸으며 느낀 모든 감정들이 바로 이 한 줄로 압축되는 듯하다.
책들이 장식된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널찍한 공간에는 박범신 작가의 생애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과 원고, 초판본 소설들이 정갈하게 놓여있고, 한쪽에는 소설을 귀로 듣는 오디오실이 아담하게 마련되어 있다. 담담한 목소리로 듣는 『소금』의 한 구절은 어떤 맛일까. 문득 음성이 박범신 작가의 음성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 위로 올라가면 데크가 나온다. 그곳에는 '강경'이라는 조형물이 놓여있다. 강경이라는 두 글자. 설레는 이 글자들 너머로 금강이 흐르고, 석양이 질 무렵이면 노을이 강물에 부딪쳐 찬란하게 부서진다고 한다. 그 광경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문학관 길 옆 언덕 산책로에는 붉은 꽃무릇이 피어 있다. 상사화를 흉내 내며 넘실거리는 그 붉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다람쥐가 떨어뜨린 도토리가 벤치 아래 뒹굴고,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늘 평화로운 곳이다.
그래서 작가는 강경을 자궁과도 같은 곳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는 곳. 모든 것을 품고 감싸주는 곳. 어디를 가든 결국 돌아오고 싶은 곳. 고향이란 원래 그런 것이리라.
강경이 품은 이야기가 그렇게 고고하게 휘몰아쳐 흘러간다. 천 년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나당연합군이 합류해 18만이나 되는 유례없는 대군이 이 조그만 강변을 밟았을 때, 백제인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역사는 흘렀다.
사계 김장생을 필두로 하는 예학이 꽃피고, 조선시대에는 삼남제일의 하항河港으로 번성하여 청주와 전주까지 상권에 둘 정도로 컸던 항구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의 십자가 위에 개신교의 여러 종파가 뿌리내려 한반도에서의 역사를 시작했다. 근대에는 충남의 중심지 중 하나로 발돋움한 작지만 강했던 도시였다.
스승의 날이 시작되고 문학이 꽃핀 도시. 박범신의 『소금』처럼 쓰고 달고 짜고 시고 매운, 모든 맛을 다 아는 고장.
그리고 그 모든 역사의 천 겹 땅 아래, 깊숙이 스며든 백제인들의 피까지 말이다.
소금문학관을 나서며 뒤돌아본다. 배 모양의 문학관이 저녁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그 앞에선 예전 박범신 작가가 마음에 들어 옮겨 심은 배롱나무가 서있다. 내가 본 배롱나무 중 가장 아름다운 놈이다. 백일 붉은 꽃을 앞에 두고 저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과거로, 미래로, 아니면 영원 속으로.
역사의 그림자. 그야말로 강경의 이름이다. 풍요 속의 빈곤. 이 역설이 강경을 강경답게 만드는 것이리라.
금강이 흐르는 한, 이 이야기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