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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Dec 30. 2015

'받은글'의 시대, 뉴스가 뭐라고.

오늘 아침, 모든 뉴스를 눌러버린 재벌 회장의 가십.


혼외자식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전직 검찰총장도 떠오르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딸들과 혼외 자식으로 태어난 딸의 연대를 그린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생각나고. (돈이 문제인 재벌가에서 저 영화 같은 훈훈함은 불가능할거라 보지만) 뜬금 없이 일부일처제의 종말을 이야기한 아웃스탠딩 기사도 떠올랐다.

단순한 가십일 수도 있지만,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할 사건. 나는 뉴스와 미디어에 대한 하나의 분기점 정도로 기억할 것 같다.



1시간 만에 '받은글'로 총정리


원래 보도는 세계일보 단독. 회장님 편지가 전부다. 언론이 그 이상 한 시간 안에 뭘 쓴다는 건 어렵다. 하지만, 한 시간 여. 온갖 정보가 쏟아졌다. 세계일보가 취재중이었다는 둥 뒷 이야기를 포함해서, 예컨대..


- 그녀가 어느 대학 출신 몇 학번인지, 이혼이 어땠는지, 온갖 시시콜콜 신상 정보와 4장의 사진 (신상은 오후 들어 또 바뀌었고, 사진도 더 나왔다)

- 또 다른 그녀가 어떻게 속을 끓이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등 (사실 개인사임에도 불구, 워낙 거물이다보니 정부 관계자와 기업이 어떻게 엮였는지까지 미확인 카더라들)
- 기업의 운명, 예컨대 어떻게 쪼개질지 산업 전망. 그 기업의 특수한 배경 덕에 형제 지분도 복잡한데 이혼까지 엮였으니.
- 위안부 이슈 등 온갖 뉴스를 덮어버리는 현상에 대한 담론, 음모론 등


이 모든 정보가 카톡으로 왔다. 이른바 '받은글', 찌라시다. 마침 ‪#‎비욘드뉴스‬ 읽는 중이라 그런지, 대체 뉴스의 역할은 무엇인지, 이처럼 온갖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시대에 미디어는 뭘 해야할지 생각이 많아졌다. 온갖 정보가 이렇게 빠르게 정리되는데, 전통 미디어들은 내일 지면에서 뭘 갖고 장사하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대신 '왜'를 알려주는 심층 보도가 미디어의 할 일 같던데, 이런 경우 미디어가 뭘?



종일 속보 '받은글' vs 뉴스


종일 '받은글'이 쓰나미처럼 쏟아졌다.  회장님을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내건 순애보의 주인공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종류부터 그 부부의 어느 한 쪽을 폄하하는 종류까지 다양했다. 어느 한 쪽을 은근히 디스하는 속보성 받은글들. 어느 쪽도 믿을 수 없었다. 문제의 그녀에 대해서는, 사진도 종류별로 쏟아졌고, 신상 정보가 쌓여만 갔다. 급기야 초반에 나돈 정보가 다 틀렸고, 알고 보니 이렇다더라는 정보가 이어졌다. 믿지 못할 정보들이지만, 수정 반론 피드백도 빠르다. 최소한 속보로 업데이트 수정되는 것은 '받은글'이 뉴스와 닮은 대목이다. 물론 수정 보완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불신과 냉소의 눈으로 참고하겠노라 하는 정도. 계속 정정되는 '받은글'을 여전히 못 믿는 것은 그것이 비공개 음지의 정보이기 때문이다. 공개된 인터넷의 정보와는 성격이 다르다.



순식간에 그녀의 사진 몇을 구경한 이후,  사진 유포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할 거란 '받은글'도 나돌기 시작했다.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내가 그 회사 홍보팀이면 그런 '받은글'을 만들어서 뿌릴 것 같다고. (그분의 사생활로 엄청 고생하고 있을 그 홍보팀 분들께는 미안^^;;)  보통 '받은글' 제작 유통에 기자들이 좀 기여하지 않나 추정해보지만, 실제 누가 만드는지 모른다. 하지만 '받은글'을 통해 원하는 내용을 전파시키고자 하는 유혹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받은글'에 대한 해명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홍보팀이 아니라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든. 핑퐁처럼 주장이 충돌하는 '받은글'이 이어지면 이처럼 별 생각이 다든다.


'받은글'이 이런 상황에서 뉴스는 어땠을까.  검색되는 뉴스들이다. 이 시간 현재 눈에 띄는 후속 보도도, 깊이 있는 분석도 없다. 사생활 보도야 한계가 당연. 그러나 회장의 사생활 덕분에 기업이 쪼개질거라는 둥, 주인이 바뀔 거라는 둥 추측만 쏟아지는게 맞는지, 오너 일가의 이슈가 이렇게 기업 전체를 흔들어도 되는 건지, 왜 수만 명의 직원들이 이런데 신경써야 하는건지.


가십 인듯 가십 아닌 가십 같은 사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뉴스만 뉴스는 아니지. 이 사건은 충분히 뉴스 가치가 있다. 모든 뉴스를 싹 쓸어버리는 태풍인데, 그게 어찌 뉴스가 아닌가. '받은글'은 미확인 카더라일 뿐이고, 뉴스는 최소한 확인을 거쳤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 '받은글'의 일부는 오후 들어 '재미언론인, 안치용 특별기고'라는 이름으로 어느 미주 교포 매체로 추정되는 미디어에 실렸다. 나름 회사 자금으로 구입했는지 확인이 필요한 서초동 아파트의 등기부 등본, 그녀의 이혼 서류까지 (이게 어찌 공개되지?) 나온다. 비록 국내 매체는 아니지만, 받은글과 미디어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뉴스'가 때로 '받은글'보다 별반 나을게 없어 보인다는게 문제다.


'받은글'에 묻히는 진짜 뉴스


'받은글'의 치명적 한계는 존재 이유다. 뉴스는 사회적 가치가 있든 없든 뉴스로서 기능할 수 있다. '받은글'은 속보의 기능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널리즘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 뉴스와 저널리즘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스캔들은 탑 뉴스지만, 이게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건 아니잖아? 배부른 소리 같지만 오늘 종일 쏟아진 재벌 회장의 이혼 관련 스토리와 어제 벌어진 위안부 이슈의 무게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중국언론 "한일 위안부 합의는 미국 압력에 의한 정치적 선택"(종합)

가디언 "위안부 합의는 일본과 미국의 승리"

아니, 이렇게 중요한 국제정치적 이슈가 있을까.

[르포]'위안부 역사' 기록하는 중국, 잊자는 한국

위안부 협상 타결 거센 '후폭풍'..헌법소원 제기 가능성도


난리다 난리. 물론 오늘 쏟아진 '받은글' 중에 이런 중요한 이슈는 없다.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도 '받은글'은 주로 유명인사의 사생활, 어떤 음모론, 뒷이야기들이 많다. 그야말로 옐로 저널리즘이 '받은글'로 전성시대를 맞은 셈이다.


'받은글'과 인권 침해


'받은글'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와 명예훼손 가능성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그녀 얼굴 사진에도 당황했지만, 금새 전 남편과 낳은 아이 사진도 돌아다녔다. 아이 사진은 가급적 참았지만, 나 역시 정보 전달자가 됐다. 친한 몇 몇들끼리만 공유하는 건데 뭐 어때. 이래도 되나 싶은 경계심은 무뎌졌다. 동네방네 떠드는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인데. 그런데 그 아이의 기본권은 어른들이 보호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포털의 경우, 공인이 아닌 사람의 개인정보가 노출되거나, 얼굴 사진이 뜨면 무조건 지웠다. 하지만 포털의 시대는 지나갔다. 폐쇄적인 단체대화방 안에서 정보가 유통된다. 관리자가 들여다볼 일도 없고, 찾아낼 방도도 없다. 그저 '우리끼리' 모두 공유하는 구조다. 카더라 하는 명예훼손 정보도 수두룩 한데 '우리끼리' 보는 거라,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그 '우리끼리'가 전국구 단위면 어찌될까. 이것은 누가 자제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시민의식에 기대기도 어렵다. '받은글' 내용이 어찌됐든 책임을 물을 대상이 없다. 추적이 되냐고? 초기에 소수들 사이에서 돌아다닌다면 가능할 수도. 그러나 이런 태풍급에서는 글쎄.


'받은글'과 선거운동


상상하기 싫다. '받은글'이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시점으로 나는 선거를 예상한다. 이른바 '흑색선전'이 '받은글'의 탈을 쓰고 등장할게 분명하다. 서로 서로 상대방에 대한 '받은글'을 만들고 뿌리느라 힘 쓰겠지. '우리끼리'의 특성은 이런 경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반론을 받아보기 어렵게 만든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할 지 모를 때, 정보가 과하게 넘쳐날 때, 우리는 피곤해질게다. 선거에 대해 냉소와 혐오가 자랄 수도 있다. 나는 '받은글'이 무섭다. 옐로 저널리즘의 지옥문이 열린 느낌이다.


옐로 저널리즘의 헬게이트가 열렸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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