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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01. 2022

<태어난 게 범죄> 그 코미디언이 남다른 이유


무지무지 유명한 코미디언의 자전적 에세이다. 그런데 태어난 것 부터 범죄. 원제가 Born a Crime. 이게 뭔 말인가 싶지만 팩트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는 서로 다른 인종의 성관계를 법으로 금지했다.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자체가 범죄의 증거다. 그의 유년기는 믿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다. 인간이 이런 고난과 수모를 감수해야 하나 싶은데 그는 1984년생.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슬프고 화가 나는데, 웃음이 나고, 웃다가 보면 울컥하는 인생. 소문대로 대단한 기록이다.  

남아공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약중인 트레버 노아. 올해 그래미 어워즈 진행자였다. BTS를 만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한국어로 말했고, BTS에 비하면 옛날 우상 엔싱크는 별거 아닌듯 말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그 엔싱크란 건, 넘어가자.  1920년대부터 미국 대통령 연례행사였지만 코로나 등으로 3년 만에 열린 4월 출입기자단 만찬의 사회도 그가 맡았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당신 취임 후 things are really looking up… 이라며, 기름값, 집세, 식비 다 올랐다, ou know, gas is up, rent is up, food is up, everything, 뼈 있는 농담을 날렸다. 자신이 불려온 이유가 흑인 혼혈?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리칸 혼혈 옆에서 지지율이 가장 높더라며 오바마 시절 인기가 더 높았다고 놀렸다.  

진짜 잘나가는구나 싶은 인물인데, 그는 어릴적 엄마 아닌척 하는 엄마와 다니며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밝은 피부로 인해 흑인 중에서는 ‘백인'으로 불리는 그와 걸으면 엄마는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 ‘유색인' 여성을 옆에 세우고 엄마는 마치 하녀처럼 뒤에서 걸었다. 공원에서 철없는 꼬마가 아빠라 부르면 아빠는 아빠 아닌척 도망갔다. 범죄의 증거라니까.  외할머니 집에서 자란 그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됐다. “잘못된 곳에 잘못된 아이가 있으면 정부는 그 아이의 부모를 구속하고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롯해 남아공의 권위주의 통치 시대, 이웃 중에 있을 ‘익명의 밀고자'를 두려워했다. 밖에서 놀다 다칠까봐 걱정하는 수준이 아닌 무시무시한 리스크다.  흑인 거주구는 항시 반란 상태였다. 반드시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행진하거나 시위 중이었고 또 진압당했다. 할머니 집에서 놀고 있으면 총소리, 비명소리, 최루탄이 군중들에게 발사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일제식민지 시절, 한국어 말살 정책을 겪은 우리와 사뭇 다르지만, 남아공의 백인들은 언어로도 흑인들을 분리하고 차별했다. 인종 차별은 피부색에 따라 서로 다르다고 가르치는 것이고,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차별과 분리가 이뤄졌다. 트레버는 일찌감치 영어를 배웠는데, 할머니는 '예수님은 백인이고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트레버의 기도에 더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트레버는 통치계급의 언어 아프리칸스, 몇 몇 부족의 언어도 통달. 백인처럼 생겼다고 괴롭히려던 줄루족 깡패들에겐 줄루족 언어로 읍소하면 바로 웃음으로 보내주듯, 카멜레온의 보호색 마냥 그때그때 언어를 달리 썼다.

사실 트레버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니 어머님이 진짜 대단하신데? 세계적으로 성공한 그보다 그 엄마가 궁금해진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흑인 남자는 농장이나 공장, 광산에서 일하고, 흑인 여자는 공장에 다니거나 하녀 일만 했단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다들 체념하고 포기한 시절에 엄마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선택했다. 비서가 되기로 마음먹고 타이핑 강좌를 들었다나. 트레버 말에 따르면 당시 타이핑 칠 줄 아는 흑인 여자란 운전할 줄 아는 맹인과도 같은 존재였다는데, 하급 사무직이 더 필요해지면서 엄마의 선견지명은 일자리로 이어졌다. "엄마는 반역자였고,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반란은 타이밍을 잘 맞췄다"고.

하기야 백인과 불법 연애를 하고, 결혼이 아니라 아이를 원한다고, 온전히 사랑만 줄 아이도 직접 선택한 엄마. 엄마는 "..제한, 벽, 두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고 날개를 펴도록. 엄마는 흑인들이 절대 가지 않는 장소에 나를 데려갔다. 그녀는 ‘흑인들은 그럴 수 없다'거나 ‘흑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 얽매이길 거부했다. 백인 아이처럼 키운 것 같다. 백인 문화에 따라 키웠다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했고, 내가 나 자신을 변호해야 하고, 내 의사와 결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114쪽)


무엇보다 엄마는 유쾌하다. 아디다스 신발을 조르는 아이에게 짝퉁 아비다스를 사준 뒤, 왜 브랜드 줄이 세개가 아니라 네개냐는 항의에 "줄 하나는 공짜"라고 웃는 엄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네가 우리 집에서 가장 잘 생긴 사람"이라고 하는 엄마의 농담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울다 웃게 만든다. 트레버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인생의 고통을 잊는 능력"을 꼽는다. '과거의 기억들은 트라우마로 이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어떤 정신적 외상도 안고 있지 않다. 나는 뭔가 고통스러운 기억이 새로운 도전을 막아서도록 놔두지 않았다.' (140쪽)

어떤 외상도 없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저런 마인드는 어려운 시절을 딛고 선 사람들에게 필수템이랄까? 한가지 더. 물론 사랑이다.

무엇보다 나는, 인간관계란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유지된다는 걸 알았다. 사랑은 창조적인 행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엄마는.. (385쪽)

그다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엄마는 '검은 세금'을 알아보는 통찰력 있는 분. 오늘날 '공정이란 무엇인가' 따지는 이들을 만나면 트레버 엄마는 뭐라 할까.

'많은 흑인 가정들이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야 했다. 흑인이고 가난했기 때문에 내려진 저주, 세대를 넘어 계속 따라다니는 저주....엄마는 ‘검은 세금'이라고 표현. 앞 세대가 약탈당해 왔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교육을 자유롭게 활용하지 못하고, 무에서부터 모두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느라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것.. ' (103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정체성으로 자란 경계인은 차별을 경계한다. 그의 코미디는 과하지 않단다. '비속어와 성적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삼가면서도 관중을 압도하는 탁월한 언변을 자랑한다'고. 사람은 빚어진다. 그는 지독한 차별 상황에서 반쪽 백인, 반쪽 흑인으로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해방'된 인간. 어떤 굴레에서도 자유로운 인간의 웃음을 보여준다.  

이 멋진 책은 작년 봄 '독서가와 행동가들' 클럽하우스 수다 때 추천받았다. 사놓고 오래 못 보다가 김혜리기자의 팟캐스트 매거진 '조용한 생활' 6월호 책으로 골랐다. 함께 소개한 책은 엘리슨 벡델의 '펀 홈'. 아빠 얘기 등 다 정리하지 못한 얘기는 팟캐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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