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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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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Feb 24. 2023

<서점일기> 오이지와 선배

서점에 갔더니 어떤 남자분이 냉장고에 뭘 맡겨놓고 갔다고. 내가 출근하는 오후 1시에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우유와 생크림, 치즈가 들어간 체리토마토 사이에 낯선 갈색봉투가 보였다. 누가 왔다가 디저트 상할까 잠시 맡겨놓고 가셨나?


"어, 혜승!" 구철선배였다. 나는 카운터를 돌아나가 선배를 꼭 안아버렸다. 우리가 문화일보 신생 부서에서 함께 일한게 거의 20년 전이다. 사진기자가 관심과 열정으로 영화 기자로 변신했고, 그때부턴 올라운드플레이어. 어떤 상황에서도 느긋하고 유쾌한 성품, 주변 누구에게나 진심인 선배라 가능했다.

온라인에선 쿠쿡. @ku_cook 아마추어를 벗어난 요리천재다. 눈팅만으로 침 넘어가는 포스팅에 황홀했다. 잘 지내시는구나 든든했다.

5월이면 아산 배방의 노지오이 300개로 오이지를 담으신다. 부러워했던, 그 귀한 오이지 10개를 어제 선배가 가져오셨다. 첫 출하 때 따는 오이, 두번째 오이의 맛이 어떻게 다른지, 씨방이 커지면서 뭐가 바뀌는지 설명하시는데 세상에.. 갈색봉투엔 오이지와 마늘장아찌가 있었다. 마늘 알이 이렇게 크다고? 너무 커서 반 갈라 넣으셨다고 했는데, 먹기 좋게 신경써주신 거였다. 알만 쏙쏙 빼서 아침에 먹었다. 아삭한 식감에다 새콤한 마늘향이 부드럽게 알싸하다. 오이지는 내가 소주설탕으로 대충 만드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소금물을 끓여 부으며 2주간 공들인 오이지는 10개월이 지났음에도 무르지 않다. 단맛 없이 짭쪼름한 맛이 깊고 향긋하다. 300개 담아 여기저기 다 나눠주고 이제 댁에서 드실 것도 10개 밖에 안 남았는데 와중에 10개를 싸들고 오신 마음은 뭐란 말인가.


아프다는 소식에 전화라도 해볼까, 뭐라 말해줄까, 생각하다가 그냥 보러 오셨다고 했다. 오래 고민하느니 몸이 먼저 움직이는건 역시 선배답다. 그 시절 내가 받았던 선배들의 사랑이 떠올랐다. 남편에게도 말 못했지만 당시 내가 상사에게 맞은 사건이 있었다. 술자리 사고치고는 거창했다. 회사 그만둘 기세였던 나를 달래고 주저앉힌 선배들은 한동안 내 수호천사 마냥 나를 지켜줬다. 가슴에 묻어둔 시간인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가슴이 다시 요동친다. 어느덧 고참 티를 내며 잘난척 하던 그때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선수 자존심으로 열일하면서도 칼퇴근해 어린 아이들을 보던 시절이다. 주말엔 가끔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고, 선배들은 짜장면 사주며 예뻐해줬다. 좋은 팀에서 사랑받고 일하면 못할게 없었다.


오래된 기억이 아침에 오이지 먹다가 파도처럼 이어진다. 이래서 내가 #마냐먹방 이란걸 쓴다. 이젠 #서점일기 더해본다. 어제 서점에서 퇴근했다가 차 돌려서 깜빡할뻔한 냉장고 오이지를 챙겼다. 먹을 때마다 추억까지 씹으면서 오래 묵힌 기운들을 살려내야겠다. 마법의 오이지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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