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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Apr 09. 2024

<레슨 인 케미스트리>98차례 거절당하고 65세 데뷔

슬로우뉴스로도 발행했다. 


“내가 요즘 [lessons in chemistry] (레슨 인 케미스트리)라는 책 보고 있는데 작가가 65세에 소설가 데뷔한 분이네요. 저 책 나오기 까지 98번 거절당했다고.”


미국 친구 K가 안부를 전하며 한마디 했다. 늦깎이로 새 도전에 나선 여자들을 소개하며 나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책, [우리는 매일 새로워진다]를 K에게 선물했는데, 딱 그런 사례의 저자라고 했다.

책은 미국에서 “완전 대박났다”고 했다. 책보다 저자가 더 판타지? 보니 가머스는 1957년 생이다.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65세였던 2022년에 데뷔작인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출판했다.

98차례나 출판을 거절당했다는 책 치고는 막판에 여러 출판사의 경쟁 끝에 선인세 계약금 200만 달러(약 23억 원)를 기록했다. 뉴욕타임스 74주 베스트셀러 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에서 1000만 부가 팔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보니 가머스와 그의 반려견 ’99’. 위키미디어 공용. 2023년 8월.

나는 먼저 드라마로 이 작품을 영접했다. 애플TV에서 같은 이름의 8부작 드라마를 선보였다. 영화 [캡틴 마블]의 배우 브리 라슨이 주인공이자 총괄 제작으로 참여했다(제작은 유명 배우 제이슨 베이트먼). 1부의 도발적 첫 장면부터 시작해 1950년대 화학연구소에서 벌어지는 황망한 일들에 빠져들면서 이틀 만에 정주행했다. 두 권으로 이뤄진 원작도 끝내 완독했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 (2023)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브리 라슨). © Apple TV+ 2023

저 우아한 여자가 엘리자베스 조트(브리 라슨)다. 드라마를 먼저 봤지만, 책을 먼저 봤다고 해도 반길 만큼 딱 그 여자다. 그녀는 화학자다. 일단 똑똑한데 1950년대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여성의 지성은 쓸모가 없다. 헤이스팅스 연구소의 잘난 남성 화학자들은 그녀를 동료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녀의 화학 지식은 커피를 드립 방식으로 추출해 동료들에게 서비스하는 일에서만 빛을 본다. ‘여비서’가 아닌 여자가 사무실에 있다는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연 그랬을까? 주인공의 질문을 똑같이 던져보자. “이름을 아는 여성 과학자가 있나요?” 똑똑한 이들은 “퀴리 부인”이라는 정답을 말할 수 있다. 19세기에 태어난 퀴리 부인 다음에 또 누구?


안타깝게도(?) 엘리자베스는 화학에 진심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밝혀내지 못한 진화 이전 분자의 비밀을 파고들었다. 연구소 왕따였던 그녀의 연구에 관심을 보인 것은 같은 연구소의 노벨화학상 후보 캘빈 에번스(루이스 풀먼)였다. 역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천재였다.


사실 주인공 둘은 천재이고, 나머지 연구자들은 모두 출세와 경력 관리에나 신경 쓰는 이들로 만들다니. 실제 현실은 이것보다 낫겠지? 더 나쁜 것은 엘리자베스가 석사 학위 취득에 실패한 사연인데, 여자는 남자에게 밀리고, 학생은 교수에게 호구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된다. 1950년대 얘기다. 21세기가 아니라…

여차저차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책이든 드라마든 하나도 놀랍지 않은 수순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아이를 갖거나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당시 사회에서 예외적인 선택이다. 캘빈은 결혼하고 아빠가 되어도 탁월한 화학자가 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엘리자베스는 결혼과 출산, 육아를 선택하면 화학자가 될 수 없다는 판단 탓인데, 이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미혼 여성 신분으로도 화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캘빈은 엘리자베스와 지적 탐구를 함께하는 동반자인 동시에, 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반려자로서 엘리자베스의 선택을 무조건 존중한다. 너무 완벽한 남자 주인공의 대사 때문에 불안할 지경이었다.

저런 남자는 21세기에도 드물지 않나 감탄하는 동시에, 맞는 말만 하는데 굳이 감탄하는 내게 당황했다. 상대와 함께 할 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온전하고 행복한 것이 사랑이라면, 캘빈처럼 다른 조건 따지지 않고 그저 사랑에만 집중하기에도 생이 짧거늘.


화학자 대신 TV 요리왕! (어? 이게 뭐야?)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를겸허하게 만들고, 엘리자베스와 캘빈도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화학자 대신 TV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당대의 스타가 된다. 엘리자베스에게 요리는 일상의 화학이었다.


“요리는 화학이고 화학은 삶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꾸는 능력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Cooking is chemistry,” she was saying. “And chemistry is life. Your ability to change everything—including yourself—starts here.”


음식은 “우리의 뇌를 일깨우는 촉매제이고, 가족을 결합시키고,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나누는 일이 삶에서 꽤 중요하다고 믿는 내게 엘리자베스는 선구자다. 그녀의 레시피를 따라 하고 싶을 만큼 요리는 드라마에서도, 책에서도 아름다운 과정이다.


어떤 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는 여자도 역시 아름답다. 섹시한 미녀이자 상냥한 주부 이미지를 바라던 방송국 간부의 뜻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늘 하던대로 머리에 연필 꽂은 당찬 화학자 모습으로 등장했다. 좌충우돌 온갖 갈등과 해프닝은 좀 뻔한 수순인데 여성 시청자들이 열렬한 응원부대, 수호천사가 될 줄이야.

그 시절 방송국도 온통 아재들 세상이지만, 엘리자베스는 시청자인 여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꿈을 심었다. ‘6시 저녁 식사’ 생방송 마지막 멘트는 주부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얘들아 상을 차려라. 너희 어머니는 이제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녀 덕분에 집에서 살림하던 여자들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조정 경기에 참여한다. 인류 역사에서 여자들은 늘, 언제나, 당대의 상식의 틀을 깨면서 관습적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남자에게 영예를 빼앗기고 잊힌 여자 과학자의 이야기는 사실 드물지 않다. DNA(디옥시리보핵산)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연구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사실 여성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연구를 훔쳤다.

왓슨은 프랭클린 사후 10년 뒤에 출간된 그의 책 [이중나선] (1968)에서 “나와 크릭이 프랭클린 모르게 그의 데이터를 사용했다”, “로지가 데이터를 직접 제공한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했고, 캠브리지에서 그녀를 대하는데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시인했다(“I’m afraid we always used to adopt – let’s say, a patronizing attitude towards her.”).


다만 프랭클린 자신도 동료 여성에게 편견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1939년 1월 플랭클린이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동료 강사에 관해 “여성이지만 매우 훌륭하다”고 쓴 적 있고, 이에 관한 해석이 갈린다).

그녀를 재조명하는 것은 후세의 몫.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사가 연기된 유럽우주국의 화성 탐사선 이름이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다.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차별받던 미국 NASA의 수학자 캐서린 존스,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엔지니어 메리 잭슨 등 세 명의 흑인 여성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도 1960년대 흑백 차별, 성차별이 노골적이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X파일] 스컬리 떠올리며 과학자 된 여성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저런 여성의 땀과 눈물을 자양분으로 태어난 소설이다. 이게 옛날이야기에 머물렀다면 이렇게까지 반향이 컸을까? 1950년대 엘리자베스 조트는 딸 이름을 ‘매드(Mad)’라고 지을 만큼 미친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도 과학계가 성평등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디어도 이런 구조에 무심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에 따르면 1920년부터 2020년까지 100년간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영화 1400편 중 영향력이 큰 작품 142편을 분석한 결과, AI 개발에 나선 과학자 캐릭터 92%가 남성이었다. 실제 AI는 남초 엔지니어들 덕분에 남성 편향적이며 여성 차별적이라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배우 지나 데이비스가 미디어 성평등을 내걸고 세운 미디어젠더연구소는 관련 연구를 꾸준히 내놓고 있다. 2018년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여성 2021명에게 조사한 결과, 63%의 여성 과학자들이 드라마 [X파일]의 스컬리 박사를 롤모델로 삼은 것으로 나타났다. 누군가는 엘리자베스를 모델로 화학을 공부할 수도 있겠다.


작가도 그렇지만, 배우 브리 라슨이 어떤 마음으로 드라마 제작까지 나섰는지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심전심이다. 물론 유명 배우가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건 이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가끔 불필요한 논란(마블의 아버지 스탠 리 추모 논란 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브리 라슨은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로 ‘캡틴 마블’을 거대한 페미니즘 영화의 일부로 해석한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책보다 좀 더 영리한 드라마  


책과 드라마는 몇 가지 다른 설정이 눈에 띈다. 드라마 버전이 좀 더 영리한 대목이 있는데, 현명한 이웃 해리엇 슬로운의 캐릭터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한 것이 마음에 든다. 책이든 드라마든 언제나 톡톡 튀는 엘리자베스의 대사들이 경쾌한데, 아마 저자의 입에서 맴돌던 말이 아닐까? 연구소 직원이 대체 왜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하냐고 묻자 엘리자베스는 답한다.


“난 과학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난 이미 과학자라고요!”


의학에 해박한 청중이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 그냥 주부라고 말할 때, 그녀는 말한다.


“이 세상에 그냥 주부인 사람은 없어요.”


65세 소설가 데뷔를 상상해 보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엘리자베스. 대단히 엄청난 캐릭터 같지만,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 그렇게 살아왔다. 교육받을 권리, 투표할 권리, 일할 권리, 하나도 없던 시절에 저항했던 ‘언니들’ 덕분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엘리자베스 말대로 “과학적으로 인간들은 99% 유전적으로 똑같다”고 할 때, 성별이든 나이든 인종이든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본능적으로 이해한 여성이 있었다.

딸 매드의 존재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대담하고 용기 있는 딸의 캐릭터, 사연 많은 개의 목소리까지 어우러지면서 교향곡처럼 이야기는 풍성해진다. 여자의 미소를 요구할 때 절대 웃지 않는 엘리자베스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감내하고 회복되는 과정에도 빠져보기를 권한다.

기왕이면 65세에 소설가로 데뷔하는 일도 상상해보자. 아참, 논픽션만 쓰던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첫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2018)을 내놓은 것은 69세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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