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609호 ISSUE “독서모임의 진화” 2024년 6월 5일
‘독서’하지 않는 시대의 ‘독서모임’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을까. 책을 매개로 독자와 독자, 생산자와 소비자를 긴밀하게 연결하며 출판산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독서모임의 현재를 조명한다. 과거와 달리 온라인 공간을 적극 활용하는 요즘 독서모임 플랫폼의 여러 유형을 참여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INTRO ‘책 모임’에서 연애하면 안 되나요? / 강양구 (지식큐레이터·<기획회의> 편집위원)
내가 ‘트레바리’ 하는 이유 / 정혜승 (북살롱 오티움 공동대표·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은 무엇이 달랐나? / 박소해 (추리소설가·그믐 ‘박소해의 장르살롱’ 진행자)
당근의 중심에서 독서모임을 외치다 / 북마녀 (웹소설 유튜버·<기획회의> 편집위원)
우리, 너무 독하게 읽지는 말자 / 편성준 (작가)
좀 늦었지만, 당시 원고를 옮겨놓는다ㅎㅎ
“혜승님. 저 독서모임으로 창업하기로 했어요!”
그는 어쩐지 신이 나서 내게 소식을 알려줬다. 같은 회사 동료였던 그에게 나의 팀으로 옮기라고 제안했다가 까였던 인연이다. 알고보니 그는 이미 퇴사를 결심했고, 창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후 몇달 만에 창업 소식을 전하는데 독서모임 회사라니.
오지랖 넓은 나는 곧바로 청년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독서모임을 해왔고, 가장 재미난 일이었다는 이유로 창업까지 한다는 해맑은 저 이를 어쩔까? 독서모임으로 돈을 버는 비즈니스가 가능할까? 시작한다고 해도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나름 책 좀 읽는 이로서 2015년 5월 그 독서모임 회사의 ‘베타테스터’(정식 서비스 이전 시범서비스 참여자)로서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일단 나의 응원이었다. 그 첫 모임 이후 모든게 달라졌다.
하필 그가 야심차게 고른 첫 책부터 문제였다. 제목은 멋졌는데 내용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각자 책이 별로였던 열댓 명 참석자들이 차례로 촌철살인 한마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마다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를 털어놓자 더이상 책이 문제가 아니었다. 토론이 이렇게 재미날 수 있구나, 갑자기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독서가였고, 토론도 곧잘 했지만 완전히 달랐다. 평소 익숙한 주변 지인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토론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같은 책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읽었고,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세대도 다르고, 직업도, 전문성도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누는 시간이 짜릿했다. 책이 꽝일수록 토론이 더 재미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책이 좋으면 좋은대로 만족도가 몇배로 높아졌다. 첫 모임 이후, 나는 트레바리 전도사가 됐다. 그 회사 이름이 트레바리다.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우리 말이다.
보통 스타트업은 문제 해결을 내걸고 창업한다. 뭔가 불편하고 아쉬운 일들을 대신 해결해주면서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낸다. 트레바리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독서모임의 귀찮고 번거로운 영역이다. 독서모임 좋은 건 다들 안다. 하지만 어떤 모임이, 커뮤니티가 지속가능하려면 헌신적 총무를 갈아넣어야 한다. 멤버들 챙겨서 연락하고, 책을 정하고, 장소를 섭외하고, 때로 강사도 모시고, 번개 모임도 해보는 모든 과정은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한데 생색은 나지 않는다. 트레바리는 멤버들이 독서모임의 좋은 것만 누릴 수 있도록, 뒷단의 귀찮은 일들을 떠맡았다. 2015년 가을에 정식으로 출범할 때 월 1회, 4개월 한 시즌에 19만원으로 서비스 가격이 책정됐다. 책을 사주는 것도 아닌데 돈까지 내고 독서모임을? 그냥 어디서나 하는 것이 모임인데? 말이 되나 싶었는데, 말이 됐다. 수십 명 회원이 금새 수백 명이 됐고, 수천 명이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20명이 모여 수평적으로 ‘OO님’이라 서로 부르며 알아서 떠들었다. 총무 마냥 모임을 지원하는 ‘파트너’가 있기는 했지만 역시 트레바리 직원이 아니라 그저 회원 중 누군가였다. 이듬해 ‘클럽장’ 제도가 생겼다. 해당 독서클럽을 이끄는 전문가 리더를 클럽장으로 불렀다. 클럽장 있는 클럽 멤버십은 4개월에 29만원으로 좀 더 비쌌다. 지금은 35만원이다.
트레바리에서 독서모임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나는 회사에서도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업무 상 책보면서 공부해야 할 일이 생겨서 같은 조직 동료들과 셋이서 뭉쳤다가 사내 동호회 마냥 오픈해 여럿이 함께 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타 부서 사람들은 서로 일로 엮여도 든든했다. 그 독서모임은 내가 회사를 떠난 뒤 100번째 모임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공부 모임을 곧잘 해오던 나는 외부 독서 모임도 꾸준히 했다. 이런 모임들은 당연히 무료다. 장소는 회사 회의실을 썼다. 그런데 왜 유료 트레바리를 계속 했을까?
나는 올해로 10년째 트레바리를 즐겼다. 2016년부터 클럽장도 맡았는데 2017년 갑자기 청와대 비서관이 되면서 급하게 중단했다. 클럽장은 참가비를 내기는 커녕 트레바리로부터 수고비를 받는게 문제였다. 어쩌다 공직을 맡았을 뿐이지만 독서모임 클럽장을 겸직한다는 오해를 살 수 없었다. 그런데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독서모임을 하지 않으니 ‘인풋’ 없이 ‘아웃풋’만 뽑아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혼자 읽는 책은 감흥이 적었다. 알고보니 나는 토론 중독이었다. 결국 6개월 만에 조용히 트레바리를 다시 시작했다. 수고비를 받는 클럽장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 업무와 전혀 상관 없는 주제의 클럽에 평범한 멤버로 등록했다. 정신 없이 바쁜 시절이었지만, 4회 중 절반만 참석하면 남는 거라 생각했다. 자기 소개할 때에는 공공에서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한다고 말했다. 트레바리 좋은 점 중 하나가 각자 모든 정보를 공개할 필요 없이 ‘혜승님’이면 충분하다는 규칙이다.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굳이 묻지 않는다. 토론을 하다보면 어떤 영역에서 일하는지 알 수 있지만 구체적 정보까지 필요하지 않다. 모두가 수평적 관계에서 편안했다. 자유롭게 격의 없는 토론이 가능한 비결이기도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읽고 싶었던 벽돌책을 다른 이들과 함께 보고 싶어서 ‘기막힌 논픽션’이라는 클럽을 열고 클럽장이 됐다. 디지털 기술 관련 사회 경제적 이슈를 공부하는 클럽도 열어 클럽장으로 활동한 클럽이 둘. 원래 멤버로 참여하던 클럽장 없는 클럽까지 한동안 3개 클럽을 하면서 저글링하듯 책을 읽었다. 과한 욕심을 부렸지만 클럽장의 책무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편하게 만나는 클럽은 유희 같았다. 클럽장은 아무래도 정해진 일정에 반드시 모임을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이 분명 있다. 여행이라도 가려면 사전에 모임 일정을 바꾸거나 환불 등 선택지를 고민해야 했다. 물론 나를 믿고 와주는 분들은 늘 감동이라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생부터 나보다 나이 많은 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멤버들과 어울려 떠들다보면 지적 희열을 느꼈다. 혼자 봤으면 놓쳤을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얻어가는 재미에 빠졌다. 어린 친구들과 계급장 떼고 토론할 수 있다면 돈을 내고서라도 하라고 주변에 소개했다. 업무상 청년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에 굳이 그런 기회가 필요없다는 명망가에게는 “당신이 클럽장 하면서 인사이트와 경험을 나눠주는 것은 사회공헌, 사회적 책무 같은 것”이라고 우겼다.
어떤 클럽장은 강연 마냥 썰을 길게 푸는 분도 있다고 했다. 훌륭한 분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몇 가지 질문으로 구성된 발제만 준비했고 가급적 듣는 쪽을 택했다. 답보다 질문이 어렵다는 생각이 내 진심이기도 했고, 소통은 원래 듣는 일이다. 유료 독서모임까지 나온 분들은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거라 믿었고, 실제 그랬다. 각각 3분이든 4분이든 한 번 발언이 너무 길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하는 것 외에는 차례로 발언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 발언과 발언을 큰 틀에서 연결하거나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한 마디 보태는 역할을 즐긴다. 매달 하는 독서모임 10년째 빡세게 하다보면 아는 건 아무래도 늘어나기 때문에 내 시야가 커졌다는 생각도 남몰래 하게 됐다. 내가 했던 클럽은 주로 논픽션, 사회과학, 인문과학 책들 중심이어서 실제 공부가 됐다. 대학의 무슨 최고위 과정이라든지, 학위 과정 못지 않게 내게는 고마운 학습 기회였다.
지난 4월 마지막 모임을 가진 ‘기막힌 논픽션’ 멤버들은 늘 말했다. 어디가서 우리가 이런 책을 읽고 함께 떠들겠냐고. 비판적 시각으로 사회를 읽는 게 조심스러운 시대였다. 회사에서는 책 표지를 감췄다는 멤버도 있었다. 아파트 평수 늘리는 이야기, 주식 투자로 재미 본 이야기, 자동차나 가방을 새로 산 이야기들이 흔한 사무실 토크인 와중에 자신이 책읽는 인간이라는 걸 들키지 않고자 하는 이도 있었다. 속내를 들어보면 정치적 이슈 등 어떤 종류의 화제는 드러내지 못하는 일터도 제법 많았다. 각자 취향이 다를 뿐인데, 책 읽는 취향을 굳이 들키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이런 우려로부터 안전한 곳으로서 트레바리 클럽을 찾았다. 지난달 모임 책은 장애인 권리와 동물권에 대한 책 <나는 동물>이었는데, 우리는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귀하다고 인정했다. 어쩌면 OECD 회원국 가운데 독서율 꼴찌인 나라의 국민으로서 비슷한 취향으로 책 읽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 자체가 기적 같았다. 그런 이들을 보다 쉽게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플랫폼이다. 수천 명의 멤버들이 있지만 관심사에 따라 클럽을 고를 수 있고, 새 친구를 만날 수 있다.
트레바리를 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모임에 참여하는 이유가 늘 궁금했다. 내가 모임에서 얻는 즐거움을 다른 이들도 좋아하기는 하겠지만 그게 전부일까? 일단 사람들에게 시간과 여유가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나 때는 말이야, 주중에는 부장님 모시고 회식하랴, 거래처 사람들 접대하랴, 주말에는 등산이니 골프니 모시고 다니기 바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 대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 뭔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이면 더 좋다. 공부인데 공부 아닌, 공부 같지 않은 공부 시간이 될 수 있다면 나쁠게 없었다. 수업 외에 학원 수강이 익숙한 세대에게 이 정도 투자는 오히려 가성비 좋은 편이다.
초창기에는 트레바리 인증샷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화제가 됐다. 손가락 하트 내세워 비슷비슷하고 고만고만한 사진과 사뭇 달랐다. 책의 주제에 맞춰 클럽 멤버들이 함께 한껏 익살맞고 귀여운 포즈를 구상했다. 클럽들은 경쟁적으로 웃긴 사진을 찍으려 애썼고, 실제 안하던 눈짓 몸짓들은 늘 웃음을 불렀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릴 꺼리를 찾는데 진심이었던 시절, 트레바리의 이런 인증샷 트렌드는 손님을 부르는 마케팅이 됐다. 친구 담벼락에 올라오는 사진들이 재미있어 보여서 트레바리를 시작하게 됐다는 증언이 꽤 있었다. 사실 여행이나 풍경, 맛집 사진을 쉬지 않고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야동’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소셜미디어 포스팅은 기본적으로 ‘있어 보이는’ 있어빌리티’가 중요한 법이다. 그런데 책 모임 사진과 기록이라니 지적 허영을 대놓고 자랑할 기회였다.
옛날에는 ‘동아리’, ‘학회’ 같은 틀에서 사적이고 비상업적으로 이뤄지던 일들이 그런 만남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상업적 토대 위에 쉽고 편해진 측면도 있다. 역시 독서모임의 진화 중 하나다. 개별적인 모임에서 사업 기회를 포착해 비즈니스를 접목시켰고, 아직 산업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워도 커뮤니티 영역에서 다른 스타트업 창업들이 이어졌다. 4개월 한 시즌으로 등록하는 방식은 꽤 많은 모임 비즈니스의 룰로 정착했다. 나 역시 몇달 전 남편과 함께 종로에 ‘북살롱 오티움’이라는 공간을 오픈했는데 뮤직클럽을 저 방식으로 만들었다. 매달 몇 번째 무슨 요일에 모이는데 4개월 단위로 등록하도록 했다. 조만간 가칭 오티움 북클럽도 같은 방식을 빌려 시도해볼 작정이다. 트레바리를 졸업하고 스스로 독서모임으로 비즈니스에 나섰으니, 10년째 트레바리를 애정해온 이로서 하산이라도 한 느낌이다.
사실 최근 북클럽 관련 고민이 없지 않았다. 오랫동안 트레바리를 해온 만큼 내 클럽 신청자가 세월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가 눈에 보였다. 사회과학 책이 소설이나 에세이 혹은 돈 버는 자기계발서에 비해 못나가는 것은 한결 같지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마케팅이나 브랜딩 관련 책을 읽는 독서 클럽이 초강세로 떠올랐고, 주식, 코인, 부동산 등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 알려주는 책, 나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위로해주는 책들이 가장 인기 있는 종류로 떠올랐다. 실제 베스트셀러 시장의 움직임이 독서모임에도 반영되지 않을 수 없고, 이게 대중화다. 2023년 상반기 내내 베스트셀러 1위는 <세이노의 가르침>, 그것도 70만부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이었다. 하반기 베스트셀러도 유튜버들이 움직였다. 베셀 저자 이름이 ‘하와이 대저택’이라는 사실에 책 좀 읽는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세계에서 그는 진짜 잘나간다. 이른바 독서가들은 ‘자청’에 낯설어 하지만 그의 <역행자>는 대세 중 대세였다. 독서모임도 이런 열풍의 자장 안쪽에 있다.
다만 이같은 처세의 시대란 것도 책 좀 읽는 이들끼리 느리게 함께 가는 맛이 달달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이도 배경도 관점도 다른데, 결이 비슷한 이들 만나는 행운이 독서모임에 있다. 지난 10년, 내가 만난 좋은 이들은 높은 확률로 그곳에서 엮였다. 독서모임은 책이 좋으면 만사형통이지만, 결국 멋진 이들과 ‘교류’하는 기쁨이 핵심이다.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