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은 유난히 화사하고 싱그러웠다. 어느 해 봄인들 흐드러지게 핀 꽃과 몽롱한 연둣빛과 눈부신 햇살과 나른한 바람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지 않으랴마는, 황사 없고 미세먼지 없고 봄 특유의 변덕스러움도 한결 덜했던 올 봄의 상쾌함은 유별났다. 인간의 이동과 생산활동이 멈추면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코로나19만 없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을 올 봄의 풍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주말과 방학이면 노상 머물곤 했던 외갓집의 정취를 떠올리게 했다. 고위직 공무원이셨던 외할아버지가 한창때 광주(光州)시 외곽에 정성들여 지으신 외갓집은 좀 오래되긴 했지만 꽤 넓은 정원과 마당을 갖춘 근사해 보이는 기와집이었다. 수목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외할아버지는 그 정원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놓아 봄이면 꽃비 홍수가 쏟아져 내렸고, 동네 어린아이들은 흔히들 그 집을 ‘꽃대궐집’이라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비용과 정성을 들여 지은 집이건만, 나는 외할머니 살아생전 외할아버지가 그 집에 머무시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외할머니가 딸(우리 어머니) 하나만 낳고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하시자, 그걸 핑계삼아 작은할머니를 얻어 따로 살림을 차리신 것이었다. 후처를 얻어 나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자신의 기구한 팔자에 대한 회한으로 말년으로 갈수록 술에 의존하시던 외할머니의 유일한 삶의 보람이자 즐거움이 주말과 방학 때마다 찾아오는 세 손주들을 거둬 먹이는 일이었다.
사시사철 참 다채롭기도 했던 외할머니의 묵은 손맛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묘사할 수 있을까. 계절의 흐름에 따라 우선 봄부터 시작해보자. 나에게 봄은 무엇보다 고소한 죽순의 맛으로 다가온다. 외갓집 뒤편으로 제법 넓은 대숲이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이른 봄이면 갓 돋아난 연한 죽순을 캐서 갈무리한 뒤 봄 내내 식재료로 사용하시곤 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반찬은 죽순무침이었다. 무쇠가마솥(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밥을 짓고 탕을 끓이는 옛날식 무쇠가마솥은 할머니 손맛의 으뜸가는 도우미였다)에 밥을 지을 때 말린 죽순을 밥물 위에 안쳐 밥과 함께 쪄낸 뒤 갖은 양념에 버무린 죽순무침은 약간 설컹한 듯 아삭아삭한 식감과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으로 봄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죽순무침과 함께 무쇠가마솥이 만들어 낸 또 다른 마법의 맛이 할머니표 계란찜이었다. 사시사철 나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던 계란찜은 이른 아침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닭장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달걀을 꺼내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달걀을 간장과 참기름 넣고 그대로 밥에 비벼 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입맛 당기기로는 할머니의 손맛이 듬뿍 들어간 계란찜만한 것이 없었다. 파, 양파, 마늘 등 향채를 다져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뒤 고춧가루를 조금 뿌려 마찬가지로 가마솥에 밥과 함께 쪄낸 계란찜을 청국장이나 된장찌개와 함께 비벼 먹는 그 짭짤하고 쿰쿰한 맛에 대한 기억은 내 미각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여름으로 넘어오면 열무김치, 갓김치, 파김치 등속의 각종 김치류가 밥상을 이끌었다. 여름날의 밥상은 마당 한가운데 자리한 대나무평상에 차려야 제격이다. 모깃불을 피운 여름 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열무김치와 콩나물, 가지, 애호박 등 각종 나물, 텃밭에서 키운 푸성귀를 큰 양푼에 푸짐히 넣고 비빈 비빔밥을 배불리 나눠먹은 뒤 평상에 누워 눈등이 아프도록 쏟아져내리던 별무리를 황홀경 속에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이면 생각나는 맛이 또 하나 있다. 아니 맛이라기보다는 놀이라고 해야 하나. 무더위가 한풀 꺾이면 부엌에서 채반이나 양파망 같은 걸 챙겨가지고 외갓집 근처 황룡강으로 나갔다. 지금은 상류에 댐이 생겨 개천 수준으로 쫄아들었다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제법 강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했다. 거기서 우리 삼 남매는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 다슬기와 손톱만한 민물조개를 캤다. 제법 묵직해진 망을 의기양양 들고 가면 할머니는 해감하기도 번거로운데 먹잘 것도 없는 걸 캐왔다며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바특하게 된장을 풀어 국을 끓여주셨다. 맛은 둘째 치고 내가 구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뿌듯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가을이 깊어지면 과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의 과일은 단연 감과 밤이었다. 외갓집 정원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단감나무와 대봉시나무였는데 단감은 가을 한철 동안 먹었고, 대봉시는 반은 껍질을 깎아 곶감으로 만들고 반은 껍질 채 익혀 겨우내 후식과 간식으로 애용했다. 집 뒷산에서 딴 밤은 또 어떤가. 군밤과 찐밤도 물론 맛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밤의 맛은 따로 있다. 할머니는 유독 단 걸 좋아하는 맏손주를 위해 밤을 쪄서 정성스레 껍질을 깎은 뒤 토종꿀을 듬뿍 넣고 버무려 달달한 꿀범벅을 만들어주셨다. 나는 지금도 밤으로 만든 디저트를 먹을 때마다 그 꿀범벅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이제 겨울방학이다. 종업식을 마치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짐을 챙겨 외갓집을 갈라치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이 청국장 띄우는 꼬릿한 냄새였다. 청국장은 부엌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띄웠는데, 그맘때쯤 우리 남매들이 가장 즐겨하던 놀이가 그 후끈하고 냄새나는 골방에서 누가 오래 버티는가였다. 청국장의 후끈함과 대비되는 또 다른 겨울의 맛이 시원알싸한 동치미였다. 우리끼리는 전라도 사투리로 싱건지라 불렀는데, 할머니의 싱건지는 사이다와 설탕으로 급조해 낸 요즘의 식당 동치미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매서운 겨울 밤, 약간 퍽퍽한 듯한 밤고구마에 곁들여 들이키는 한사발 싱건지는 최고의 밤참이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갖가지 먹거리로 항상 풍성했던 외갓집의 밥상에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할머니가 술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기 직전의 여름방학이었다. 그 여름방학은 시작부터가 어딘지 이상했다. 방학을 맞아 여느 때처럼 들뜬 마음으로 외갓집 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는데 안방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안방 한가운데 걸려 있던 외할아버지의 큼직한 사진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할머니는 당신의 병색이 깊어져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뒤, 떠나간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십수 년간 걸어두었던 할아버지의 사진을 떼서 다락 깊숙한 곳에 감춰두셨던 것이다. 그 여름, 삶에의 의욕을 놓으신 할머니는 그토록 사랑하던 손주들 돌보는 것마저 힘겨워하셨고 우리들은 두 주일인가 외갓집에 머무르다 영문도 모른 채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몇 달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다락에서 비단보자기에 곱게 감싼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한 어머니는 그 사진을 끌어안고 한참을 우셨다. 그리고 십 년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결코 할아버지를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셨다.
나에게 한식의 맛을 일깨워주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40년이 넘어간다.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손주들을 챙겨 먹이면서 쓸만한 사람으로 커가기를 바라셨겠지만, 그 기대는 채워드리지 못한 채 입맛만 까다로운 중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올 봄 코로나19로 인해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그런 회한이 더욱 깊어진다. 그 어려움이 절정에 달했던 어느 날, 와이프와 집 근처 식당에서 청국장을 먹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청국장 맛과는 거리가 한참 먼 맹숭맹숭한 청국장을 떠먹으며,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다시 먹을 수만 있다면 이 어려움을 이겨나갈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모처럼 와이프의 손을 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손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한다는 것, 위안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손의 감촉에서 겨울 밤 바람소리에 무서워 떨던 손주를 꼭 안고 쓰다듬어주시던 마른 가죽 같은 할머니의 손길을 떠올렸다.